2.
김나나는 오후를 거의 패닉 상태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핸드폰 액정에는 세 글자의 이름, 이.종.민 이라고 떴다.
이종민은 보름 전, 복지부의 고위 공무원들과 함께 찾아온 컨설팅 회사의 젊은 컨설턴트였다. 멀끔하게 잘 생기고,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그리고 품위있어보이는 넥타이를 맸다. 그 옷이나 양복이 얼마나 비싼 건지는 김나나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최소한 평소에 봐오던 우중충한 공무원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그날 밤, 회의가 끝난 뒤의 회식자리에서, 반쯤은 우연으로, 또는 반쯤은 이종민이 작업을 걸어서 두 사람은 술을 마셨다. 그 때 이종민의 작업은 어떻게 보면 찌질하다고 할 정도였는데, 그래도 김나나는 이종민을 포기할 수 없었다. 명색이 컨설턴트 아닌가. 지잡대를 나온 주제에 컨설턴트와 약혼했노라며 최고급 외제차를 타고 친구들에게 십오만원짜리 스테이크를 사먹인 친구년을 생각하면, 이종민이 그 날 조금 찌질했다고 해서 그대로 버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 날 이후 전화통화 두 번을 더 했고, 밥을 한 끼 더 먹었다.
두 번째 만나서 밥을 먹던 날, 김나나는 여자의 직감으로 이종민이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컨설턴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뭐가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라면 김나나도 하나하나 설명할 자신은 없었지만, 아무튼 자신의 친구들에게 십오만원짜리 스테이크를 사주고 외제차에 태워줄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 뒤로 전화통화를 두 번 더 했고, 또 전화가 오는 것을 두 번 씹었다.
이종민과 앞으로 진도를 더 나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하는 중이지만, 방금 전화를 걸었던 이사와는 같은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으니 어쩌면 앞뒤 사정을 알 지도 모른다. 김나나는 핸드폰 액정을 지긋이 쳐다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
"나나씨, 저 이종민입니다."
"네, 안녕하세요."
"통화 잠깐 괜찮아요? "
"네."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돼요? "
"네?? "
"아, 왜 그렇게 놀라세요? 괜찮은 오페라 표가 생겨서요. 되게 유명한 건데. 오페라의 공룡 알죠? "
"오페라의 공룡? "
"그 왜 어느 폐가에서 티라노사우르스가 나타나서 오페라를 부르면서 악당들을 섬멸한다는..."
"네..."
"아홉시 표인데 시간 괜찮으면 함께 봐요."
오페라라면 여태 비싸서 못 봤지, 보고 싶지 않을리가 없다. 그저 극장안에 들어있는 것 만으로도 온몸의 엔돌핀 지수가 팍팍 솟아오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김나나의 머릿속에는 딴 생각이 잔뜩 들어있어서, 오페라 티켓이라는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네, 제가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요."
"왜요 ?"
"있잖아요, 저기 이사님 있잖아요- "
"무슨 이사님요? "
"김 무슨 이사님...."
그 때 갑자기 이종민의 전화기 건너편으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종민이 다급하게 대답하는 소리. 이어서 이종민이 전화로 속삭였다.
"좀 이따가 전화 드릴께요.아무튼 이따 저녁에 봐요."
"근데 제가 저녁에 약속이..."
김나나의 대답이 끝나기 전에 전화가 끊겼다. 김나나가 어깨를 늘어뜨리며 전화를 끊고, 한숨을 폭 내쉬었다. 박진희가 옆에서 꿀밤을 먹였다.
"이년아, 넌 남자들하고 전화할 때 말꼬리 좀 질질 끌지 마."
김나나가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그래도 언니처럼 욕하는 거 보다는 낫다 뭐."
"그나저나 저녁에 오늘 황선생님이 쏘기로 했는데 너 약속있어? 정말 안 간다고? 그냥 고기도 아니고 꽃등심인데? 이야, 너 배 불렀다."
황학규 주사가 또 쏜다고? 이번에도 꽃등심? 김나나는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고보면 예비 아내 친구에게 십오만원짜리 스테이크를 대접한 컨설턴트가 대단한 봉인 것도 아니다. 삼인분 사인분씩 먹어치우는 박진희 같은 사람 예닐곱명에게 꽃등심을 한 번 쏘면 적게 잡아도 오륙십은 들텐데, 그걸 보름이 멀다하고 쏘는 황학규 주사 같은 사람이 진짜 봉일 수도 있다. 주식 투자에 성공해서 외제차를 사고, 경매에 성공해서 빌라를 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재개발에 투자해서 또 몇 배를 벌고. 돈이 돈을 버는 가속도가 장난이 아니다. 오십대의 기혼남이 아니라면 황학규 주사 같은 사람을 꼬실 일이다.
"어머, 너 진짜 대단한 약속 있나보다. 꽃등심을 포기하고 가다니. 어디 가는데? 누구 만나? 이종민 아저씨 또 만나? "
김나나는 절대 딴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된다던 김정봉의 말을 떠올렸다. 아니, 사실 김정봉은 절대 딴 사람에게 말해서는 안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은밀하게 진행하자'는 알듯 모를듯한 말을 했을 뿐인데, 자꾸 그 말이 기억속에서 증폭되고 있는 것이다. 김나나는 임금님귀는 당나귀귀를 외치는 심정으로 박진희에게 사실을 밝히고 싶었지만, 차관님 지시라는 말이 자꾸 걸려서 결국 얼버무리고 말았다.
*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가운데 퇴근시간이 다가왔다. 저녁 여섯시가 넘어가자 직원들이 대략 나이순으로 하나둘씩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여섯시반 가량이 되자 절반 정도가 퇴근한 가운데, 김나나의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가 찍혔다. 김나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떨리는 마음으로 전화기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
"김나나씨? "
전화기 건너편에서 굵고 힘있는 목소리가 울려왔다. 김나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지금 동사무소에서 길 코너쪽 돌아서 뒷편에, 세븐일레븐 편의점 하나 있죠? 그 앞에 있습니다. 얼른 나와요."
김나나는 다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는 조용히 가방을 들고 빠져나갔다.
김나나는 건물 뒷편으로 돌아가서 편의점을 바라봤고, 잠깐 눈을 끔뻑거렸다. 세븐일레븐 앞에 서있는 것은 진한 밤색에 헤드라이트가 김나나의 머리보다 큼직한 거대한 외제차였다. 차를 잘 모르는 김나나가 보기에도 나 외제차요 라고 번호판에 써져있는 듯한 그런 차였다.
김나나가 후문 앞에 나타나자, 외제차가 마치 그녀를 알아봤다는 듯 불을 깜빡였다. 그리고 검정색으로 거울처럼 코팅된 유리창이 스르륵 내려가고, 안에서 거대한 얼굴 하나가 나왔다. 보름전 회의때 봤던 얼굴이다. 중앙에서 내려온 복지부의 실장을 바로 옆에서 수행하고 있던, 그러나 수행이라기에는 너무 뻣뻣한 태도였던 얼굴이다. 위계질서가 확실한 공무원 생활이 이미 삼년. 그녀에게 김정봉은 실장과 동급으로 기억되어 있었다. 말단 공무원에게 중앙부처 실장이란, 직장인에게 사장님보다 더 높은 존재다.
"자, 이쪽으로 타세요."
김나나는 잔뜩 긴장해서, 그가 타라는대로 차 반대편을 향해 돌아갔다. 어휴, 차가 너무 커서, 이쪽 편에서 저쪽 편까지 가는 거리가 무슨 지하철역 입구에서 매표소까지 가는 거리는 되는 것 같았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서 쇼파 위에 앉는데, 쇼파 크기가 침대라고 해도 믿을만큼 넓었다.
김정봉 이사는 김나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머리는 듬성듬성 벗겨졌고, 피부는 조각칼로 퍼낸 듯 거칠다. 얼굴 크기는 김나나의 두 배는 될만큼 컸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나이가 그렇게 많아보이지는 않는다. 아마도 삼십대 후반이나, 높게 잡으면 사십 세 정도? 김나나는 잠시 자신도 김정봉 이사를 똑바로 마주 쳐다봤지만, 조금 더 마주보다가는 한 대 얻어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였다. 김정봉은 눈싸움에 이겨서 만족한다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녁 식사 전이죠? 우선 식사부터 합시다."
"네-? "
"스파게티 좋아하죠? 스파게티 먹으러 갑시다."
차에 부르릉 시동이 걸렸다. 엔진소리가 마치 낮게 그르릉거리는 호랑이 소리 같았다. 그 때 김나나의 전화기가 울렸다. 김나나는 마치 큰 실수라도 한 사람처럼 허겁지겁 핸드백에서 전화기를 꺼냈다. 손이 바들바들 떨려서 그런지 핸드백을 놓쳤고, 내용물이 우루루 쏟아졌다. 변속기와 가속페달 위로도 이런저런 물건이 굴러떨어졌다.
"어머, 죄송해요, 죄송해요."
김정봉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차를 다시 세우고, 쏟아진 물건들을 하나하나 주워서 김나나에게 건네주었다. 전화기가 여전히 요란한 소리를 울렸다. 김정봉이 전화기를 주워서 김나나에게 건네주었다. 김나나는 발신자 표시기에 뜬 이름을 확인할 틈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아 네 종민씨..."
김정봉의 눈썹이 살짝 구겨졌다.
"네... 네... 그렇죠 오페라... 그런데요... 제가 좀 갑자기 일이 생겨서... 네... 네... 네... 아무튼 그렇게 돼서... 네... 네... 잠깐만요... 좀 이따 전화 드릴꼐요."
김나나는 건성으로 네- 네- 대답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김정봉의 눈치를 살폈다. 바윗덩이같은 굳건한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다.
"자, 가시죠."
김나나는 핸드백의 짐을 주섬주섬 챙기고, 김정봉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차가 도로로 나설 때 쯤 김정봉이 전화기를 꺼냈다.
"김정봉입니다. 아까 내가 지시한 보고서 있었죠? 그거 진행이 어떻게 됐나? 내일 오후까지 초안을? 안 돼. 갑자기 급한 상황이 생겼어. 오늘 저녁 10시까지 초안 완성해서 나한테 메일로 보내. 내가 밤에 마무리해서 내일 아침에 제출할테니까."
갑자기 그의 목소리가 버럭 커졌다. 눈에 힘이 들어가고, 콧김으로 불을 뿜는 것 같았다.
"뭐라고? 무슨 약속인데? 뭐? 지금 나하고 장난하자는겁니까? 당신 컨설턴트 아냐? 프로페셔널로서의 자세가 되어있다고 생각하나? 열 시에 메일 확인 할테니까 틀림없이 보내도록 해."
김정봉이 벌개진 얼굴로 씩씩거리면서 전화를 끊었다. 김나나는 꼭 자기가 뭔가 잘못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잔뜩 얼어붙었다. 문득 치마가 무릎 위로 너무 올라온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그녀는 치마를 좀 더 무릎 아래로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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