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업 : 잡담외전 #1
미국 네바다에서 어느 아침에 썼던 글.

라디오 드라마처럼 감성적인 글이 오히려 애착이 남는다.


잡담 외전 #1 (雜談 外傳) 



"스물 셋, 혼자 오랫도록 마음에 품어두었던 사랑을 편지로 띄우기에
는 쑥쓰럽도록 많은 나이입니다. 이렇게 누구인지도 밝히지 않고 그 사
람의 문간에 끼워두기에는 더욱 더."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늦은 오후에 경민이를 만나고 차를 마시고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술
을 마시고 말다툼을 심하게 한 후, 다시 친구를 만나 취하도록 술을 마
시고 돌아온 자취방, 그 낡은 문틈에는 우표도 붙지 않은 오렌지색 봉투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봉투는 두껍고 빳빳한 종이였고, 뒷면에는 붉은 꽃 한 송이와 '님에
게' 라는 가늘고 단정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듯한 
글씨와 그림이었다.

술이 많이 취해있었기 때문에 나는 맑은 물로 볼가심만 한 번 한 후
에, 이부자리도 제대로 펴지 않고 벌렁 누워버렸다. 잠이 가물가물 들 
무렵에 꿈인지 아닌지 느닷없이 편지가 생각이 났고 왜 그랬는지 잠이 
확 달아나버려서 일어난 것이다. 유치원 광고전단도 아니고 전기요금 고
지서도 아닌, 연애 편지였다. 연. 애. 편. 지. 

"당신을 아주 오랫동안 지켜보았습니다. 꽤 여러 해 동안 저는 당신의 
그림자였습니다. 당신이 맥주를 마실 때에 나는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고, 당신이 서점에서 책을 고른 후 가게를 나
서면, 나는 당신이 서있던 자리에서 당신이 넘겨보았던 책을 뒤적이며 
그 향기를 맡고는 했습니다. 별다른 뜻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저 당신
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당신의 더 가까운 곳에 있었을 뿐입니다."

나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혹시라도 나를 따라 다니는 낯익은 얼굴이 
있지 않나, 혹시라도 짚이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으나 마땅
히 떠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충분히 교우관계가 적고 조심
성이 많았으나, 내 근처를 몇 년동안이나 따라다닌 사람이 있다고는 생
각이 되지를 않았다.

"그저 숨어서 당신을 지켜보기만 하면서 한마디 인사조차 나누지 못한 
것은 순전히 사람 어려워하는 저의 탓입니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말한다
는 것, 특히나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하는 마음을 말한다는 것은 너무
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을 대하는 것보다 시간이 흐르는 것이 더욱 두렵습
니다. 제 위에 겹겹히 쌓여가는 시간의 무게와, 거기에 겹쳐가는 당신의 
무게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언젠가 깔려 죽어버릴 것만 같습니다. 그러
나 다행입니다." 

다행? 다행이라니. 나는 딸꾹질을 두어번 했다.

나는 편지를 덮고 한숨을 내쉬었다. 깔끔한 오렌지색의 편지지 뒷면에
는 손으로 그린 앙증맞은 붉은 꽃 한송이가 있었다. 그 꽃송이와, 그리
고 편지지속의 깔끔한 글씨체가 어딘지 낯이 익다는 느낌이 들었다. 편
지를 보낸 이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당신이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
자와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아니기를 맹세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수백 일, 수천 일을 기다려온 기회가 
제게도 왔다는 사실이 마냥 행복하기만 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
다. 저와 결혼해 주세요. 당신이 확답을 내릴 때 저는 당신앞에 나타나
겠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천구백구십구년 가을의 어느 날에 씁니다."

이건 무슨 황당한 경우인가. 편지는 더도 덜도 아닌 딱 거기에서 끝나
고 있었다.

도무지 누군지도 알 수 없이, 단지 스물 세 살이라고만 자기를 밝힌 
여자가, 사랑한다, 게다가, 결혼하자, 는 편지를 보낸다니. 게다가 확답
을 내릴 때 까지 신분도 밝히지 않겠다니.

나와 경민이 오늘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나눈 이야기까지 알고 있다면 
나를 따라다녀도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을 터였다. 그러나 나는 더 이
상 그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편지지를 봉투속에 다시 집어넣은 후 책상
위로 대강 던져두었다. 도무지 당황스럽기가 짝이 없는 일이었다. 골때
린다는 말 밖에는 별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맴도는 것은, 나에게 편지를 쓴 것이 누구일까 하
는 생각보다는, 편지속에 들어있던 마지막 구절이었다.

"당신이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
자와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아니기를 맹세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한 여자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더 이상 아무 관계가 아
니기를 맹세했다는, 사랑했다는, 아무 관계가 아니기를, ..."

잠시 맑아졌던 머리가 다시 흐리멍텅해지고 속이 거북해졌다. 나는 화
장실로 뛰쳐나가서 변기에 대고, 잔뜩이나 취했던 술을 게워낸 후에 다
시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술에 취해 있었고, 경민이 때문에 지쳐있었
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내가 어렵게 말을 꺼내었을 때 그때껏 제 이야기를 즐겁게 떠들어대던 
경민은 입을 다물었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경민아."

내가 다시 말을 반복하자 경민은 눈을 내리깔며 술잔을 바라보았다.

"네 말을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우리가 그렇게 급할 필요가 있을
까? 서로에게... 당분간 우리는 친구로 남아도..."

경민이 술을 들어 꿀꺽 삼키다가 기침을 토하는 바람에 내 말은 끊겨
버렸다. 나는 휴지를 뽑아내어 경민에게 주었고, 경민은 그것으로 입을 
막고 한참이나 쿨룩거렸다. 경민이 접었던 휴지를 쓰레기통으로 집어던
졌을 때부터 테이블 위에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침묵만이 맴돌았다. 어
두컴컴한 조명 사이로 시끄러운 노래소리가 어지럽게 휘날렸다. 나는 그 
답답함과 어색함을 죽이기 위하여 담배를 입에 물었다.

경민과 나 사이를 오가는 것은 어지러운 담배연기와, 그리고 그나마 
짐이 덜어진 침묵 뿐이었다. 

"오빠. 나도 담배 하나 필께요."

경민은 내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피를 꺼내어 어색하게 입에 물고는 
불을 붙였다. 라이터를 도로 빼앗으려다가, 그러면 침묵이 더욱 무거워 
질 것 같아서 가만히 놔두었다. 몇 번을 서툴게 칙칙거리던 경민이 마침
내 담배에 불을 붙이기는 했으나, 그러기가 무섭게 쿨룩쿨룩 기침을 터
뜨렸다.

나는 가만히 경민에게서 담배를 빼앗았다. 경민은 아무 말없이 담배를 
내어주는 대신에 제 빈 잔에 술을 따라서 훌쩍 마셔버렸다. 그러고는 다
시 젖은 기침을 몇 번 했다. 경민은 술잔을 내려다보았고 나는 재떨이를 
내려다 보았다. 경민은 술을 몇 잔 더 마셨고, 나는 담배를 몇 개피 더 
피웠다. 술이 약한 경민이나 폐가 약한 나로서는 자주 있지 않은 일이었
다.

"왜죠?"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고 하지. 그러니 사랑이 아닌 것에도 이유가 있
을 수 없어."
"좀 더 책임있게 이야기 해줄 수 없나요?"
"글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책임있게 대답할 말이 없기도 했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그녀와의 주파수는 친구로 맞추어져 
있을 뿐이었다.

"오빠. 난... 그냥 좋은 친구인가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경민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도수 높은 알코올과 소금기 많은 눈물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다.

"솔직히... 결혼이나, 평생을 함께 하자는 말은 내게 부담스러워."

"그래서, 그냥 좋은 친구인가요?"

"..."

"제가 하룻밤 함께 잤다고 해서 평생을 책임지라고 엉겨붙는 구식 여
자는 아닌 거 알잖아요. 그리고 오빠도 하룻밤 때문에 평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는 건 아니잖아요."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거야?"

"하지만 오빠. 저를 그냥 친구로만 대했었던가요? 나한테 먼저 정을 
줬던 것은 오빠잖아요. 모든 걸 그저 술 탓으로만 돌릴텐가요?"

이야기가 그리로 넘어가면 내게 할 말이 없었다. 기실 그 날 술에 더 
많이 취한 것은 경민이었고, 그 때 내가 해야했던 일은 경민을 안전하게 
그녀의 자취방까지 바래다 주는 일이었다. 경민은 만취해서 쓰러졌던 여
학생 답지 않게 그저 잠 덜깬 사람만큼만 비틀거리다가, 학교 뒷편의 벤
치에 앉아 쉬어가기를 고집했다. 그녀는 춥다고 했고, 그리고 어쩌다보
니 나는 그녀의 어깨를 껴안게 되었고, 다시 어쩌다보니 그녀의 입을 맞
추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귀기 시작했고, 어느 만취한 날에 나는 나도 
모르게 경민의 자취방으로 찾아갔으며, 거기에서 그녀와 함께 잤다. 하
지만 그게 사랑이었을까?

"솔직히 말하면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내가 
너에게 느끼는 것은 사랑이 아니야."

그 말을 듣고 경민은 한참이나 울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고개
를 깊이 파묻고 어깨를 벌벌 떨며 한참이나 울었다. 파르르 떨리는 가늘
은 어깨와 꿀럭거리는 하얀 목젖을 보며 나는 내가 한 말을 후회했다. 
그녀는 목젖을 울려 흐느끼면서 더듬더듬 내게 말했다.

"오빠. 나... 사실은... 구식 여자에요. 하룻밤 잤으니까... 평생... 
책임져야 해요."

한참이나 지난 후에 경민이 술잔을 들어 한 잔을 더 마셨다. 그녀의 
옅은 화장이 눈물 때문에 망가져 안쓰러워 보였다. 혹시 이 안쓰러움이 
사랑일까? 나는 혼자 속으로 잠시 생각해 보았다.

"그럼, 오늘이 마지막이겠군요."

경민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아냐, 경민아, 나는 그런 뜻이 아니야. 이건 진심이야. 넌 정말 좋은 
후배이고 좋은 친구야. 너와 평생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 아니
야."

경민은 피식 한 번 웃고는 자리에서 나섰다. 그녀의 걸음이 위태로와
보여 나는 잽싸게 뒤를 따랐으나, 경민이 워낙 매몰차게 내 손을 뿌리치
는 탓에 더 따를 수가 없었다. 

"여보게, 자는가?"

편지를 책상에 던져두고 아슴하게 잠이 들려던 무렵에 가볍게 문 두들
기는 소리가 났다. 부스스 일어나 문을 열어보니, 문 바깥에는 노인이 
대접 하나를 들고 서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술을 그렇게 먹었어. 정군답쟎게. 여기 꿀물 좀 
들게 그려."

나는 불을 켜고 노인을 안으로 들였다.


술을 많이 마신 날의 꿈에는, 술자리가 그대로 이어졌다. 만취와 꿈의 
공통점이라면 토막토막으로만 기억이 난다는 것인데, 다음날 아침에 그 
토막난 기억들이 대체 꿈속에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일
인지 헷갈리는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경민의 죽음을 내게 알려준 것은 노인이었다. 노인은 꿀물 대접을 내
려놓고서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네 각시 있잖은가. 그 참한 처이. 죽어버렸어."

나는 마시던 꿀물 사발을 내려놓고는, 꿀물과 과음했던 술을 한꺼번에 
게워낸 후에, 다시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교통사고 답지 않은 교통사고였지. 육교에서 떨어지는 마침 그 찰나
에 콘테이너 트럭이 지나갔으니까. 시체로는 사람이었는지 고양이었는지
를 가눌 수가 없고, 퉁겨져 나가있던 손가방을 보고서 알았다고 그러더
군."

노인은 덤덤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야기를 했다. 어찌나 덤덤한지 
나까지도 그 덤덤함에 옮아,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떡일 정도였다.

"꿀물 들게.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구 산 사람은 살어야지."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서 꿀물을 한 모금 들이켰으나, 뱃속에 불똥이 
튀는 듯한 기분이 들어왔다. 나는 마셨던 꿀물 뿐 아니라, 뱃속에 든 푸
른 물까지 꺽꺽 게워내었다. 노인은 가만히 내 등을 두드려주었다. 나는 
경민의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잡으려 했다. 그리고 뱃속에서 아무것도 나
오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게워내었다. 꿀물 그릇은 졸지에 토사물 그
릇이 되고 말았다.

"어르신. 어르신이 부럽습니다."

"뭐가? 늙은 것이?"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떡였다. 노인은 다 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
를 끄떡였다.

"어르신. 경민이를 한 번만 더 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시체는 이미 다 부숴져 버렸다네."

"경민이의 혼이라도 볼 수 없을까요?"

"다시 보아서 무엇을 할려고 그려?"

그러고보니 할 말이 없었다. 그녀를 만나서,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저승길 길조심 하라는 말을 할 것인가? 그
보다 어색하고 우스운 노릇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노인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더니, 내 손목을 가볍게 움켜쥐었
다. 노인은 내 손금을 짚어보고, 나이와 생일을 묻고, 경민이의 생년월
일을 묻더니, 한참이나 혼자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먼저 일어나서 내
게 손짓을 했다.

"따라오게."

"어디로 가실려구요?"

"따라 와보면 알 것이여."

나는 영문을 알지 못하고 노인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노인은 자취방
의 문을 나서서는 앞장서서 어두운 골목을 걸어나갔다. 

"이보아, 자네 그 새악시를 처음 만난 것이 언제였는가?"

"올 봄이었습니다. 서너달이 지났네요."

"그 전에 그 새악시를 본 적이 없었는가?"

"없었는데요."

"꼭 그렇지는 않을걸세. 내가 손금허고 사주를 보니까 그래."

"어르신네, 제가 경민이와 그 전에 만난적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자네 팔자에 그렇게 써있어."

"글쎄요. 그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는거
죠?"

"이 늙은이 말만 믿고서 그저 따라와보게."

노인은 그렇게만 대답하고서 계속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노인이 걷
는 골목은 집 근처의 다른 골목들보다도 훨씬 어두웠다.

얼마나 걸었는지 정확히는 기억할 수가 없었다. 아마도 삼십분? 혹은 
이십분? 아니면 한 시간일 수도 있다. 자취방이 여러 골목을 꼬불꼬불 
들어간 깊숙한 곳에 있기는 했지만, 지금 노인이 걷는 길은 그 중에서도 
도무지 가본 적이 없는 깊은 골목길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밝은 빛이 눈을 아프게 찔렀다. 손으로 눈을 가리고 
제자리에 멈추어 서자,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부터는 나는 모르는 길이여. 자네가 앞장을 서서 돌아댕기면서, 
자네 새악시도 찾아보고 그려."

노인의 말을 듣고 나는 눈을 가린 손을 살짝 내렸다. 환하지만 어딘지 
바랜 빛들이 눈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우중충하고 멋 없는 회색의 교복 상의에다 싸구려 넥타이를 서툴게 묶
고 앉아있는 오십여명의 까까머리들. 십년 가까이 보지 못했으나 너무도 
낯이 익은 그 얼굴들, 그리고 그 사이에 앉아있는 것은, 나 였다. 고등
학교 일학년의 나였다.

나는 연애편지를 쓰고 있었다. 아니, 연애편지를 쓰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뒤에서 세 번째 줄어 앉아 선생님 몰래 연습장에 편지 초
안을 쓰면서 가슴 두근거리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한 병에 들어있는 물과 기름같다고나 할까. 아니면 
내 영혼이 타인의 몸속으로 들어갔다고 할까. 나는 과거의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생각하며 어떻게 행동할는지를 다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과거의 나와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나는 굳이 별다른 신기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아마도 노인 탓
이리라. 세상의 신비스런 일들이라는 것이 대개는 사람들의 과장된 칭송 
덕택으로 그 신비함을 얻게 되는 법이다. 그런데 노인에게는 그저 모든 
일이 당연하기만 한 모양이었고, 그 탓에 나 조차도 당연한 일로만 느끼
는 것이었다.

열 일곱 시절의 내가 좋아했던 여자는 누구였을까. 나는 지금 내가 이
렇게 열심히 쓰고 있는 편지를 받는 사람이 누구였는지 기억할 수가 없
어서 연습장의 앞장을 넘겨보았다. 연습장의 꼭대기에는 몇 개의 가위표
가 있고 그 아래에는 '친구 상미에게 사랑을 전하며' 라고 쓰여 있었다.
상미?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그맘때 등하교길 버스에서 오락가락하며 
자주 만나던 여학생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이름과 얼굴, 학교, 나이 
말고는 기억나는 것이 있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아마 그때에도 그 이상
은 알지 못했었으리라. 그리고 그 여학생에게 지금 사랑을 전하려고 하
고 있다.

사랑. 사랑이라는 말에는 씁쓸한 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름과 
얼굴, 학교, 나이. 이만큼만을 알면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었는가하
면 하룻밤을 함께 하고서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
는 죽었다. 


그날 야간자습시간 내내 편지를 쓴 나는 그 편지를 봉투에 접어서 두
꺼운 '일반수학 定石' 책갈피에 곱게 끼워넣은 후 버스를 탔다. 사람이 
많고 날씨가 더운 탓에 과거의 나,는 꽤나 불유쾌했나보지만, 나는 그저 
그런 과거의 나를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여고 앞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었고, 교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학
생 한떼가 우르르 올라탔다. 오랜만에 보는 그 발랄하고 단정한 여고생
들의 건강한 모습에 마음이 잠시 가벼워 지는 듯. 하지만 과거의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버리는 모양이었다.

그러고보니 여학생의 무리중에 어딘지 낯이 익어보이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얼굴이 달걀처럼 동그랗고 눈매가 반들반들하게 새침한 여학생. 
제 동무들과 조잘조잘 수다를 떨고 있는 여학생이 아마 그 상미라는 여
학생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과거의 나, 는 가방에 손을 넣어 책틈에 끼워진 편지를 만지작 
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여학생의 곁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펄떡펄떡 뛰
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상미라는 여학생조차 겨우 기억한 정도였으니 
오늘 일의 결말이 어떻게 났었는지는 아주 새까맣게 모르는 일이었다. 
다만 지금의 내가 상미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별다른 일이 진전
되지는 않았었던 모양이었다. 아무려나 과거의 나,를 흥미있게 바라볼 
때였다.

- 끼이이익 

무언가에 놀란 듯 버스가 갑자기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멈추어 섰다. 
사람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비틀거리고, 화들짝 놀란 나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려 했으나, 뒤에서 한 때의 사람들이 밀어젖히는 바람에 손잡
이를 놓쳐 균형을 잃고 앞으로 쏠려가버렸다. 간신히 넘어지지는 않았지
만 앞에 서있던 중학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내게 밀려서 우당탕 넘어지고 
말았다.

나는 내 발걸음이 대강 수습되자마자 얼른 넘어진 여학생의 가방을 받
쳐서 들어주고, 그 여학생을 일으켜 주었다. 여학생의 단발머리가 찰랑
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미안해. 아이구 이걸 어쩌지. 미안해요."

조그맣기가 인형같은 소녀를 밀어젖혀 넘어뜨린 것은 여간 미안스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여학생들이 가득찬 버스에서 남학생이 넘어지는 것
은 부끄럽기까지 한 일이다. 여학생의 도시락 가방을 주워서 그녀의 손
에 건네주는 순간에, 나는 넋을 잃었다.

"1-2 이경민"

소녀의 옷자락에 매달린 조그만 명찰에는 그렇게 씌여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얼굴에 솜털이 보송송한 소녀. 핏줄이 드러나보일만큼 
하얀 피부에 단추구멍같은 눈을 반짝이는 얼굴, 내가 기억하는 경민보다 
많이 마르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경민이었다.

- 경민, 경민아.

나는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어보려고 했지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몇 번 더, 애타게 그녀를 부르려 해보았지만 아무런 일도 없었
다.

"괜찮아요."

경민이가, 작은 소녀가 지저귀듯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가 죽
었다는 사실, 어쩌면 그녀는 나 때문에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새
삼스럽게 떠올랐고, 설움이 북받쳐왔다. 나는 울부짖듯 큰 소리로 경민
을 불렀다.

- 경민아. 내 목소리 들리니? 경민아.

"다치지 않았니?"
"괜찮아요."

- 경민아. 경민아. 나야, 나란 말이야.

"그런데 얼굴이 어딘지 좀 낯이 익네. 혹시 어디서 나 본 적 있어?"

"아뇨."

그 때 급작스레 멈추었던 버스가 이번에는 급작스럽게 출발했다. 사람
들이 요란하게 고함을 질렀고, 그녀는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으나 나는 
그러지 않았던 탓으로 쿠당탕 몇 발짝 비틀거리면서 물러갔다. 그 사이
에 생긴 자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금새 메꾸어져 버렸다.

과거의 나, 는 경민의 얼굴을 두어번 더 쳐다보면서 고개를 몇 번 갸
웃거리다가, 다시 가방안에 쥔 편지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나, 는 안타
깝게 단발머리를 찰랑이는 경민의 모습만을 쳐다보았다. 경민은 여기저
기로 눈을 돌리다가, 나와 잠시 눈이 마주쳤으나 얼른 창밖으로 눈을 돌
렸다.

버스에서 내리자 정류장에서는 노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은 내 어
깨를 몇 번 두드렸고,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로 되돌아 들어갔다. 나는 
골목길 입구에서 머뭇거리다가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걸로 끝인가요?"

"나두 다는 모르지. 허지만 끝이라구 단정짓지는 말게. 종종 아주 끝
났다고 생각하지만, 사람 사는 세상에서 그렇게 칼로 베듯이 아주 끝나
는 일은 자주 있지 않은 법이여."

"하지만..."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 말게. 사람 일이라는 건 그렇게 급한 것이 아
니라니까. 설령 죽었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끝은 아니야."
노인의 말에 허리가 끊겨 나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말 없이 
어두운 골목길을 걷기만 했다. 골목길에서는 고약한 썩은 냄새와 고운 
꽃향기가 함께 나고 있었다. 애초에 오면서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었다.

"여러 가지 냄새가 나는데요?"

"그렇지? 하지만 머잖아서는 냄새들이 모두 사그러들어서, 그저 구수
하고 담담한 냄새만 남게 될 것이여."

"이 고약한 썩은 냄새들도요?"

"허믄. 꽃향기만 있다면 오래 가지 못해. 허지만 썩은 내음이 섞여야 
나중에는 구수한 냄새가 되는 벱이지."

"이 길이 도대체 어떤 길이죠?"

"이 길? 허허허..."

"어떤 길이길래..."

"바로 자네 머릿속에 난 길이지, 워디긴 워디여."

"예...?"

"허허허."

나는 노인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노인도 더 설명해 주지 않
고 딴 이야기를 꺼내었다.

"가끔씩, 언젠가 한번 겪었던 일을 똑같이 한번 더 겪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

"예."

"그 때가 자네한테는 아마 아주 중한 때일티니께 잘 간직하여. 미래나 
과거에서 온 자네가 자네를 지켜보고 있을 때니께."

그 말을 듣는 순간에야 나는, 어처구니없는 또 한 가지의 사실이 기억
났다. 친구 상미에게, 운운하던 그 편지의 마지막 줄, 거기에는 고등학
교때 내가 애써서 도안한 붉은 꽃이 하나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목이 무척 말라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방바닥에는 토사물이 담긴 그
릇 하나가 놓여 있었다. 원래 꿀물이 담겨있던 그릇이 맞는 듯, 달고 쓴 
냄새가 섞여서 풍기고 있었다. 나는 그 그릇을 주워들고 나가서 하수구
에 부었다.

마침 마당에서 빗질을 하고 있던 노인이 내게 알은 척을 했다.

"이보게. 어제는 술을 많이 마셨드만. 무슨 일이 있었든가?"

"아니요. 무슨 일은... 제가 어제 좀 많이 취했었지요?"

"그러게. 내가 꿀물을 한그릇 타다가 뒀는데 그것은 먹었나?"

"예. 달게 잘 마셨습니다. 그런데 혹시 어제 제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
셨었는지요?"

"이야기는 뭔 이야기여. 술에 녹아떨어진 사람 붙잡구서."

"꿈을 꾸는 바람에... 꿈에 어르신이 나왔거든요."

"꿈도 젊을때나 꾸는거지. 이삼십년은 꿈을 안 꾼 것 같으이."

"그렇군요."

"달게 자는 것이 더 좋기는 허지만, 한번씩은 꿈이 워뜬 거더라... 하
구 아삼삼할 때가 있어."

다시 방안으로 들어가서, 이부자리를 털고 방향제를 뿌리며 방을 치웠
다. 그러다가 나는 편지가 아무곳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설마-? 
그 편지조차 꿈이었을까.

그러나 그 편지가 꿈이었든지 아니었든지, 아무려면 어떠랴. 아마도 
경민에게 전화를 해야 할 것 같다. 제일 먼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확인
해보고, 살아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할 것이다. 어쩌면, 예전에 40번 버스
를 타고 xx 중학교를 다닌 적이 있었는지를 물어볼지도 모르겠다. 그리
고 어쩌면, 사랑한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어쩌면.

2000. 3. 6. 아침 10:30

by 찬별 | 2006/03/13 12:52 | 글쓰기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coldstar.egloos.com/tb/227645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next



야채와 과일만 먹고 순하게 살고 싶다
by 찬별 2007 Egloos top100
간단한 공지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이 느슨하게 섞인 가벼운 술자리 정도로 생각해주시길.

공지는 여기에 (클릭)

메일 : coldstart@파란.컴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이 출간되었습니다. 관련 내용이 궁금하시면 클릭


찬별의 려행기 (연재)

이 블로그는 구글 애드센스를 통해 월 $100 이상의 수익을 창출하고 싶습니다.


Locations of visitors to this page

카테고리
전체
잡담
글쓰기
찬별의 려행기
찬별의 료리강좌
한국음식의 탄생
책읽기
TOYS
IT 이야기
광고이야기
직장관련
인생
주식
신혼만담
미분류
태그
20대직장인부동산에빠져라 신혼여행 맛의걸인-_- 세계의주식고수들 음식 네이버 링크프라이스 발리 mp3 내이글루결산 가리봉동 바퀴벌레도애완동물 오피스 여행 한국속의외국 씽크프리 NHN 2010년베트남에서돈을캐라 독서일기 렛츠리뷰
이글루 파인더
이전 블로그
2008년 09월
2008년 08월
2008년 07월
more...
최근 등록된 덧글
으하하하 ㅠㅠㅠㅠㅠㅠ;;..
by Rapunzel at 09/06
OTL 쿨럭!!!
by 유클리드시아 at 09/06
빅브라더 비슷한거군여
by 찬별 at 09/05
허걱 -_;;
by 찬별 at 09/05
은행 싸이트야 1. 법적..
by 찬별 at 09/05
욕나오는거 맞아요. 은..
by catnip at 09/05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서..
by 쩜 at 09/04
찬별 결과의 '영업은 부적..
by 쩜 at 09/04
홋카이도에서 비슷비슷한..
by 쩜 at 09/04
난 백신이란 말이 나올..
by 쩜 at 09/04
백신쓰다보면 바이러스라..
by 시퍼렁어 at 09/04
욕해쥐야죠. 내 마누라까..
by 거울 at 09/04
이야기를 보니 아시모프..
by 초록불 at 09/04
달러는 아니지만 유로 ..
by 허안 at 09/03
아놔... 출장안마서비..
by 찬별 at 09/03
그런데 그 마사지 찍고 ..
by 찬별 at 09/03
구글광고는 접속자의 지..
by 우기 at 09/03
그러니까 그 구글 마사지..
by 찬별 at 09/02
그 모님 저도 좀 소개시..
by 찬별 at 09/02
스님답게 등신불 되기를..
by 머미 at 09/02
최근 등록된 트랙백
Xanax lawsuits.
by Xanax without a presc..
Xanax norx needed ..
by Buy cheap xanax wi..
에고그램 테스트
by Fuzzy Cat
이상하게 이런 건 꼭 해 ..
by 파란미디어
모두들, 냉동실 정리는..
by 다인의 편의점 이것저것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
by 다인의 편의점 이것저것
남 얘기 같지 않아.
by . ....그리고 ↗
찬별님의 '한국음식 그 ..
by 런~의 밥하기 싫은 날 '..
"한국음식, 그 ..
by 야옹이의 야옹이 세상
한국음식, 그 맛있는 탄생
by punkthaus.com ♬
rss

skin by 꾸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