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북 무림에 눈을 찡긋거리는 무적의 고수 정불서가 있었다면, 사천 무림에는 뇌백지가 있었다. 그는 사천 소림사에 열두 살에 입문했다. 그가 처음 배운 무술은 가장 초보적이면서도 가장 심오하다는 나한권이었는데, 뇌백지는 불과 보름만에 나한권의 형을 완전히 익히고, 석달만에 나한권의 깊은 오의까지 완벽하게 깨쳤다. 오의를 깨쳤다는 말에 완벽이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의 동접 중에서 나한권 대 나한권으로 싸워 그를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동접은 고사하고 이삼십대의 피끓는 젊은이들조차도 나한권으로만 겨루어서는 뇌백지를 이기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십년이 지나도록 나한권만 배우는데, 뇌백지는 불과 반년만에 나한권을 완전히 끝내고 반야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린 그에게 반야공을 가르친 것은 그의 대사조인 혜공선사의 용단이었다. 나한권은 오의가 심오하다고는 하지만 아무튼 그 오의는 몸놀림 속에 있었다. 그래서 아무리 둔한 사람이도 삼십년쯤 나한권만 하면 어느 사이 오의를 깨닫는데, 반야공은 그렇지 않았다. 반야공 그 자체가 반야심경 한 구절 한 구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에, 경전에 대한 공부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천성이 둔한 사람은 삼십년 아니라 삼천년을 익혀도 깨우치지 못하는 무술이 바로 반야공이었다. 반야공을 배우면서부터 뇌백지의 진가는 드러났다. 열두세살의 나이. 아직 사타구니에 털도 안 난 주제에 색이 무엇이고 공인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까. 하지만 그는 반야심경을 아주 쉽게 금세 이해했다. 그리고 반야공이라는 무술은 배우는 그 자리에서 완벽하게 깨달았다. 혜공선사가 반야공의 시범을 한 번 보이자, 뇌백지는 그 자리에서 반야공을 시전해보였다. 뇌백지가 반야공을 익히는데 걸린 시간은 총 열흘이었다. 열흘 뒤 대련을 했을 때, 조금 어처구니 없지만, 사천 소림의 장문인은 뇌백지의 반야공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방심했다거나 얕봤다는 것은 핑계가 될 수는 있지만, 수긍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방심했다고 한들, 사천 일대에서 열손가락에 꼽히는 고수가, 무공을 열흘간 익힌 열두살짜리 꼬마의 일장을 막아내지 못한 것이다. 혜공선사는 뇌백지에게 더욱 심오하고 다양한 무술을 가르쳤다. 금강경을 공부해야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인 금강신공, 역근경을 배워야 사용할 수 있는 무술인 역근공, 일양경을 익혀야 사용할 수 있는 무술인 일양공, 등등. 그의 나이 열일곱살이 되었을 때, 그는 소림 일천년의 비공들을 모조리 다 익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상태가 되었다. 열다섯살이 되던 해, 그는 사천 소림의 장문인과 정당한 비무를 했는데, 단 이십여 초 만에 뇌백지가 완승을 거뒀다. 그 정도의 실력이면 지금 당장 무림에 출도해도 사천땅 뿐 아니라 중원 전체의 오대 고수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숭산 소림의 고수가 아무리 많고 강하다고 해도 뇌백지 정도의 실력이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혜공선사는 뇌백지의 진전을 이 곳에서 멈추게 하지 않았다. 그는 사천소림의 장경각으로 뇌백지를 데려갔고, 그 곳에 소장된 삼만 권의 장서와 무공을 모조리 독파할 때 까지 폐관수련을 선언했다. 삼년의 세월을 보낸 후, 열 여덟살이 되어 기골이 더욱 장대한 뇌백지가 출도했을 때, 사천성 뿐 아니라 중원 무림이 모두 긴장에 휩싸였다. 열다섯살에 사천 소림의 장문인을 꺾을 실력인데 그로부터 삼년이 흐르는 동안 더욱 더 무공을 쌓았으니, 그 실력이 과연 어떨까 하는 것이다. 2. 하지만 중인들의 기대와 달리, 지난 삼년의 폐관 수련은 뇌백지의 무공을 한없이 퇴보시켰다. 쉽게 달아오른 불은 쉽게 꺼진다는 옛말도 있거니와, 뇌백지는 그간 배웠던 무공을 모조리 잊기라도 한 것처럼 장권 하나 제대로 내뻗지 못했다. 그가 무공을 잊은 이유는 간단했다. 너무 많은 무공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도망가는 방법을 열가지도 넘게 아는 고양이가 사자를 피하지 못하는 것과는 약간 다른 문제였다. 뇌백지가 배운 무공은 대부분이 이론에 근간을 둔 것이었다. 반야심경을 읽고서 반야공을 익혔고, 금강경을 읽고서 금강공을 익혔고, 역근경을 읽고서 역근공을 익힌 식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닐곱 권의 경전을 읽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삼사백권, 삼사천권, 삼사만권으로 권수가 올라갈 수록 경전들이 혼선을 일으켰다. 묘사가 과할수록 대상에서 멀어지고, 설명이 많을수록 핵심에서 멀어지며, 형상화가 많을수록 본질에서 멀어지며 생각이 많을수록 믿음에서 멀어지고 이론이 많을수록 실천에서 멀어진다. 뇌백지는 지난 삼년간 삼만명의 사람들이 각자의 목소리로 떠들던 것에 파묻혔고, 그 결과 자기가 원래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를 잊었다. 그 정도에서 끝나지 않았다.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이 사바세계인지 극락인지 지옥인지를 잊었고, 자기가 읽는 책의 내용이 원래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남의 생각인지를 잊었다. 소위 무아의 경지에 도달했으나, 성현도 절대고수도 되지 못했다. 사천 소림은 크게 실망했다. 더 이상 뇌백지에게 사천소림의 무공을 중흥시킬 것을 기대할 수는 없는 형편이 되었다. 과격한 사람들 중에는 아예 뇌백지를 파문시키라는 둥, 팔을 잘라버리라는 둥 하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사천 소림의 방장은 뇌백지의 비상한 두뇌를 아주 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뇌백지는 고차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 바보같은 행동을 보이기는 했지만, 숫자 계산이나 장표 정리처럼 똑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전같은 비상한 능력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뇌백지는 절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하는 총무 담당으로 임명되었다. 사람이 이천명이나 살고 있는 절인만큼, 그 살림살이를 꾸리는 것은 보통이 아니었다. 수만평의 땅에서 도지를 받아내야 했고, 수백 군데의 상점으로부터 보호세금을 받아야 했다. 엄청난 량의 식료품을 관리해야 하고, 의복을 구매하기도 해야 한다. 뇌백지는 이러한 일들을 조금의 오차도 없이 명료하게 해냈다. 이러한 일들의 특징은 첫째가 잠시도 쉴 틈이 없다는 것이고, 두 번째 특징은 잘 하면 잘 할수록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뇌백지가 살림을 맡기 시작한지 삼년이 지나자, 절의 살림은 풍요로워졌지만 뇌백지 본인은 잠시도 쉴 틈이 없이 하루종일 일만 하게 되었다. 3. 흔히들 반복이 만성화되면 세월이 지겹도록 느리게 갈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실상은 꼭 그렇지는 않다. 계속되는 반복이 지겹든지 말든지간에, 그것이 흐르는 속도는 이상할 정도로 빠르다는 것이다. 뇌백지는 자신의 머릿속이 점점 하얗게 된다고 생각했다. 총무 일을 맡은지 일년 가량은 나쁘지 않았다. 방장이 총무라는 업무를 맡겼을 때, 그는 소림의 문을 나와서 환속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잠시 했다. 누구나 우러러보는 천재 무승으로서 총무일은 너무나 천하고 더럽고 하찮은 것이었다. 차라리 명산대천을 찾아다니며, 폭포 아래에서 면벽 수련을 얼마간이라도 하다보면 돈오점수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스스로가 더 이상 그 혼란의 길을 걸을 자신이 없었다. 끝없이 떠들어대는 뜬구름 잡는 소리를 잊게 해주는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동시에 본의아니게 이론을 잃음으로써 무공을 전폐당한 자신의 현실로부터 도피할 방안도 필요했다. 차라리 그런 것들을 모조리 잊은 채 지금처럼 숫자나 뒤지고 돈이나 만지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자신의 의지로서 총무 일을 맡겠다고 수락했다. 처음 일년은 힘들었다. 자괴감과 모멸감이 밀려왔고,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다시 책더미속으로 뛰어들까 하는 생각도 했다. 가장 귀하고 높은 일을 하던 사람이, 상인처럼 돈 따위나 만지는 가장 천하고 더러운 일을 하게 되었으므로, 그 괴로움을 견디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나 무조건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해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깨어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때때로 기경팔맥이 꼬이거나 역행하면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는 일도 적어졌다. 그의 마음은 고통스러운 동시에 평화로웠다. 그러나 그런 감정을 일일히 설명할 수 없을만큼 일상이 바빴다. 그는 심지어 어떤 날은 하루에 66시간씩 일하기도 했다. 그런 세월이 조금 더 흐르면서 고통과 평화와 바쁜 일상들은 모두 한 지점으로 수렴해갔다. 그것은 바로 무덤덤이었다. 뇌백지는 무덤덤해져갔다. 머릿속은 이리저리 섞인 회색이 되는가 싶더니, 그 회색이 차츰 하얗게 탈색되어갔다. 뇌백지는 새로운 것을 보아도 자극을 받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에도, 좋은 술에도, 기막힌 경전에도, 재밌는 경극에도, 예쁜 여자에게도, 그 무엇에도 말이다. 그러면서 시간은 굼실굼실 흘러갔다. 뇌백지는 자신이 무공을 익히던 시절이 있다는 것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기억이 자신의 과거인지 타인의 과거인지는 헷갈리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년이 지나갔다. 홍안의 미소년이던 뇌백지는 마흔살의 중늙은이가 되어있었고, 여전히 하루 66시간씩 일했다. 뇌백지는 자신의 미래를 대략 예측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십년이 더 지나도, 그는 여전히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66시간씩 일할 것이고, 혼자서 먹고 살기에 필요한 것보다 두세 배 정도 되는 돈을 벌 것이다. 때때로 열다섯살 이전의 그, 천하를 제압할 무공을 몸에 익히고 세상의 추앙을 받던 시절, 홍안의 소년으로서 사천 소림사의 장문인을 제압했던 그 짜릿한 기억을 추억할 것이다. 그리고 뇌백지는 그런 자신의 미래에 대해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하지만 뇌백지의 인생은 그가 생각한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사연은 이런 것이다. 평소처럼 뇌백지는 늦은 퇴근을 마치고 집 앞의 객점에서 소주에 삼겹살을 먹고 있었다. 명색이 소림사 총무인데 술과 고기를 먹느냐고? 아 뭐 그럴 수도 있는거지. 아무튼 그걸 좋도록 마셨는데 전에 없이 갑자기 호기가 치솟았다. 누구 만만한 사람 없나 비틀비틀 걸어가다가, 마침 반대편에서 비틀거리며 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딪혔다. 고맙게도 그가 먼저 시비를 걸었다. "눈 똑바로 뜨고 다녀 이 씹새야. 길에서 아무데나 부딪히지 말고." 부딪힌 사람을 봤더니, 생긴 건 멀쩡한 편이고 기골도 단단해보이지만 술에 취해있고, 무엇보다도 잠시도 쉬지 않고 한쪽 눈과 턱을 찡긋거리고 있었다. 뇌백지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서 불안하게시리 눈이나 찡긋거리는 이런 놈 정도라면 싸워도 승산이 있다. 순간적으로 그런 판단을 한 뇌백지는 취객의 멱살을 움켜쥐면서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런데 취객이 움찔 놀라는 눈치로 몸을 피했다. 아슬아슬 뇌백지의 손이 멱살을 비껴가자, 뇌백지는 괜히 성질이 났다. 평소에 점잖은 뇌백지이지만, 가끔 개같이 취하고 싶은 날도 있는 법이다. 뇌백지는 에라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마구 고함을 질렀다. "야이 씨발놈아, 감히 피해? 죽을래? " 그러면서 뇌백지가 주먹을 내뻗었다. 취객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뇌백지는 뒤를 쫓으면서 멱살을 움켜쥐는데 성공했지만, 취객이 몸을 젖히자 우드득 하면서 멱살이 찢어져나갔다. 이번에는 취객이 주먹을 내뻗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뇌백지의 얼굴에 주먹이 적중했다. 순간 눈앞이 아찔했지만 뇌백지는 눈을 부릅뜨면서 고통을 참았다. 동시에 그는 손을 휘둘러 취객의 목을 후려쳤다. 취객이 목을 얻어맞고 몇 발짝 물러섰다. 두 사람이 노려보면서 자세를 가다듬었다. 설명은 길었지만 사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객점 안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방금 일어난 일을 제대로 본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강북 무림맹 맹주인 정불서를 수행하고 있던 무림맹의 십대 고수들 조차 방금의 움직임은 거의 알아보지 못했다. 그리고 싸움을 했던 당사자인 정불서 조차도 이제까지 이런 고수는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고수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아놔 말리지 마. 아놔. 내가 허리가 아파서 오늘 그렇지, 한때는 사천 소림사에서 제일 잘 나갔어. 아놔." 물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말릴려고 해도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할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싸움을 했던 고수는 너무도 찌질하게 외쳐대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튼 이야기는 커져나가기 마련. 그날 주막에서의 싸움은 호사가들에 의해 "강북 무림맹주의 앞길을 가로막는 용기를 지니다니, 너는 도대체 누구냐?" "사천성에 오면 사천성의 법률을 따르라. 내가 사천성의 왕이다." 대략 이런 대사를 나누었던 것으로 윤색되고, 그날의 싸움은 당대 무림 최대의 결전으로 꼽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계기로 무공을 되찾은 뇌백지는 사천의 패자로 군림하게 된다. ps. 이렇게 써나가다보면 신경쇠약 구룡쟁패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방금 했다 -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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