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쇠약 구룡쟁패 - 북명 조아벽
그나저나 제목을 새로 정해야 할텐데...




*
뇌백지는 어린 시절을 서역소림사의 영걸로 보냈다. 무공이 뛰어난 만큼 올바른 심성도 함께 가지기를 바라는 그의 사부들 덕택에, 사리 판단이 올바르고 강직했다. 또한 서역소림사는 비록 송나라의 강역 바깥에 위치하고 있지만 원래 소림에 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나라에 대한 충성을 중요하게 가르쳤다.

어린 시절의 뇌백지는 그 모든 가르침을 배우고 자라서 생각이 올바르고 정의로웠다. 동시에 기상이 호방했다. 하지만 무공을 잃은 뒤 서역소림사의 사무일을 수십년간 돌보면서 그런 기상을 잃어버렸다. 그가 갑자기 악인이 된 것은 아니다. 다만 선악에 대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상을 빠듯하게 살다보니, 선악의 구별에 대한 필요성을 잊은 것이다.

뇌백지는 정불서와의 칠일 낮 칠일 밤의 싸움을 계기로 무공을 되찾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올바른 심성까지 함께 되찾지는 못했다. 그가 무공을 찾는 순간 악행을 일삼는 대마두가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아무 생각없이 세상을 살다보면 선하기보다는 악하기가 쉽고, 용감하기보다는 비겁해지기가 더 쉽고, 진취적이기보다는 보수적이기가 쉽다.

뇌백지는 조금씩 악에 물들어갔다. 그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의로운 무사를 해치고,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하고, 스승과 사형제를 멀리했다. 그의 악행이 남의 부녀자를 약취하고 금품을 강탈하는 정도에 이르자, 결국 사문에서 징계에 나섰다. 서역소림사의 고수인 반천망 등이 뇌백지의 무공을 빼앗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뇌백지가 순순히 근맥을 자르고 무공을 돌려줄 리 없었다. 그는 서역소림사의 고수 십여명을 죽였고, 그 길에 사문을 불지르고 나왔다. 의로운 인물들이 이때문에 크게 분개했다. 앙숙처럼 지내온 숭산소림사의 무색 선사까지도 뇌백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실제로 뇌백지의 앞을 가로막을 수 있는 사람은 드넓은 중원에서 열 손가락에 간신히 꼽을 정도였다.)

뇌백지는 패거리를 이끌고 마적질 하는 것을 즐겼다. 만약 뇌백지가 차근차근 뒷골목에서 성장했다면 지금 그의 신분을 생각해서라도 마적 같은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뇌백지는 갑자기 무공을 얻은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에, 그의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는 사람을 괴롭히기를 즐겼다.

*
그 날도 뇌백지가 수하를 이끌고 강을 건너는 배 한 척을 덮쳤다. 그들은 배에 탄 남자들을 핍박하다가 죽이고 여자들은 희롱한 뒤에 노예로 팔 생각이었다. 처음에 사내 몇 명이 저항하려고 나섰지만, 황남산이 큰 칼로 사람 하나의 팔을 자르자, 더 이상은 아무도 덤벼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때였다.

- 예끼노오옴-

호톨소리는 아주 꼬장꼬장하고 기운이 넘쳤다. 무공이 담기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크고 깊은 기개가 담겨있었다. 

뇌백지가 눈을 들어 호통소리가 난 곳을 바라봤다. 부하들에게 위협당해 밀려났던 사람들 가운데에, 나이든 선비 하나가 서있었다. 중간 정도의 키에 몸이 호리호리한데 얼굴빛이 누리끼리하고 귀밑머리가 하얀 노선비였다.

"네놈이 누군지 이제 알아보겠다. 네놈은 스승을 네 손으로 죽이고 무학대종사이면서도 기껏 마적질이나 일삼는다는 뇌백지렸다-! "

노선비의 말투는 추상같았다. 카랑카랑하고 차가웠다. 뇌백지는 자기도 모르게 조금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가 스스로 갖잖다는 듯 피식 웃었다.

그가 무공을 되찾은 이후에 지금까지 그의 면전에서 싫은 소리를 한 사람은 반천경과 번천망 등 서역소림사의 사승들이 마지막이었다. 그들은 모두 뇌백지의 손에 죽었다. 이후로 그에게는 변홍주, 차경, 황남산 같은 간사한 무리들밖에 없었다. 그들은 무공이 평범하지만 성품이 간사해서 항상 뇌백지의 주변을 돌며 듣기 달콤한 말만을 했다. 뇌백지라고 그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다만 머릿속이 텅 비어있기 때문에 싫은 것과 좋은 것 말고는 관심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노선비의 카랑카랑한 말투는 뇌백지의 백짓장같이 하얀 머릿속을 꿰뚫고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그때문에 불편한 것이다. 하지만 뇌백지는 지금껏 단 한번도 자신이 선사하는 죽음 앞에 굴복하지 않는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서역소림사의 영웅인 반천경 등도 그가 서서히 목을 조를때에 그들의 눈동자에는 공포가 서렸다. 노선비라고 다를리가 없었다.

"저 늙은이가 망령이 들어 오래 살기를 포기한 모양이다. 그래, 내가 바로 스승을 죽이고 마적질이나 일삼는 뇌백지다. 내가 오늘 늙은이의 간은 얼마나 야들야들한지 한 번 씹어봐야겠다. 남산아, 네가 저 늙은이의 한쪽 팔을 잘라라."

뇌백지의 심복인 황남산이 큰 칼을 들고 노선비에게 다가갔다. 노선비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크게 꾸짖었다.

"천하에 도가 없어지고 의협이 없어져, 나쁜 일을 일삼고도 오히려 힘이 강하다며 큰소리를 치는구나. 하지만 군자는 오직 옳지 않음을 두려워할 뿐이다, 천하의 간적아."

노인의 서슬퍼런 호통에 황남산이 주춤거렸다. 뇌백지가 황남산을 바라보며 화난 눈빛을 보내자, 황남산이 망설이면서 큰 칼을 들고 주춤주춤 다가섰다. 하지만 노선비는 황남산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노선비는 손을 뻗어 하늘을 가리키며 뇌백지에게 말했다.

"저 하늘의 새를 보아라."

뇌백지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새를 보았다. 날개가 하얀 보통의 물새가 깍깍거리면서 날아다닐 뿐, 특이한 것은 없었다. 그때 노선비가 말했다.

"새는 새의 길이 있어 새의 길로 날아다닌다. 이 물 안의 물고기를 보아라. 물고기는 물고기의 길이 있어 물고기의 길을 간다. 저 하늘의 구름은 구름의 길을 가고, 해는 해의 길을, 달은 달의 길을 간다..."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황남산이 으와악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어 칼을 크게 휘둘렀다. 큰 칼이 노선비의 한쪽 팔을 쳐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팔이 잘리지는 않았지만, 뼈가 드러날만큼 큰 부상이었다. 노선비는 조금도 피하거나 막지 않았기 때문에, 뇌백지는 노선비에게 무공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때 노선비의 곁에 있던 청년 하나가 노호성을 터뜨리며 벌떡 일어서 황남산에게 달려들었다. 청년의 기합소리는 맑고 투명했으며 손끝이 하얗다. 그 또한 닭모가지 하나 비틀 힘 없는 사람으로 보였는데, 기껏 붓자루 하나를 쥐고 칼을 든 거한에게 덤벼드는 모습이 우스워 보였다.

황남산이 코웃음을 치면서 칼로 청년을 치려고 했는데, 붓이 기묘하게 움직이면서 오히려 황남산의 요혈을 노렸다. 황남산이 당황해서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청년이 한발짝 다가서며 다시 붓을 내밀자, 황남산은 급한 나머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고 말았다. 청년이 다시 그 뒤를 쫓자 노선비가 청년을 만류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내가 기껏해야 거죽이 약간 긁혔을 뿐인데 그렇게 요란을 떠느냐. 너는 조용히 앉아있거라."

"스승님, 저 도적이 스승님의 팔을 상하게 했으니 제자가 저 놈의 팔을 먼저 자르고..."

"저들의 죄는 목을 잘라 마땅하지만, 네 스승의 늙은 거죽에 칼집을 냈다고 팔을 자를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너는 반드시 공을 앞세우고 사를 뒤로 하여 일의 경중을 알아야 한다. 알겠느냐? 네가 옳고 그른 이치를 따지지 않고 그저 보복을 하기 위해 칼을 뽑으면 그것이 저기 저 뇌백지와 무엇이 다르겠느냐."

제자를 꾸짖는 노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온화했지만, 목소리가 카랑카랑해서 황남산과 뇌백지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눈앞에 대적을 두고 제자에게 교훈을 주는 태도에 황남산이나 뇌백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청년은 노선비의 말에 한 마디의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고개만 주억거렸다.

노선비의 출혈이 심해, 바닥에 곧 피가 흥건히 고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까와 똑같이 허리를 꼿꼿히 펴고 있었으며, 눈썹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뇌백지는 사람을 파리 잡듯 쉽게 죽였지만, 노선비의 기개가 비범한 것에 위축되었다.

옛 이야기에서 관운장은 등에 박힌 화살을 뽑고 뼈를 긁어내고 불로 지지는 동안 한 마디의 비명도 지르지 않고 조용히 바둑을 두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하지만 관운장은 평생 싸움터를 종횡무진한 대장군이고, 노선비는 무공이라고는 모르는 시골의 학자이다. 어찌 똑같이 비교할 수 있을까.

제자에게 말을 끝낸 노선비가 뇌백지를 돌아보았다. 노선비의 기개에 경외심을 품고 있던 뇌백지는 노선비와 눈이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눈을 딴 곳으로 돌렸다. 이 때 노선비가 갑자기 벼락같이 호통을 질렀다.

"네놈 뇌백지! "

뇌백지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면서 헉, 하고 작은 신음을 토했다.

"세상 만물에는 정해진 이치가 있고 길이 있어, 하다못해 개미나 버러지같은 미물들도 자기에게 정해진 길을 간다. 그런데 네 놈 뇌백지는 어째서 인간의 길을 두고 개나 버러지 같은 길을 가는가."

노인이 호통을 치자 뇌백지는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찔끔찔끔 물러섰다. 뇌백지가 만약 손을 써서 노선비를 공격한다면 한 손가락으로도 노선비를 죽일 수 있겠지만, 뇌백지는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사람보다 훨씬 힘이 강한 말이나 물소가 감히 사람을 해치지 못하는 것과도 비슷했다.

뇌백지가 인상을 잔뜩 지푸렸다가, 갑자기 와악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달려들었다. 그가 벼락같이 달려들어 노선비의 코앞까지 다가섰다.

원래 노선비와 뇌백지는 약 삼장의 거리를 두고 있었는데, 뇌백지가 몸을 한 번 흔들자 이미 노선비의 코앞까지 다가선 것이다. 청년이 혼비백산하여 뇌백지를 막아서려고 했지만, 뇌백지는 이미 손을 번쩍 치켜들고 있었다. 뇌백지가 손을 내려치면 노선비는 그 자리에서 죽는 것이다.

뇌백지는 손으로 뱃전을 후려쳤다. 쾅- 하고 요란한 소리가 나면서 뱃전이 반쪽으로 부러졌다. 뇌백지가 한 손으로 치는 힘에 사오십명이 탄 배가 가라앉을 듯 출렁거렸다. 뇌백지가 주먹을 치켜들어 노선비의 코앞에 들이민 다음 외쳤다.  

"너를 죽여버리겠다! 내게 살려달라고 빌어라."

그러자 노선비가 다시 한 번 호통을 쳤다.

"네 이노옴! 세상 사람들이 너를 두려워하느냐? 네 칼을 두려워하느냐? 미련하게 힘만 믿는 못난 놈아. 너는 좀도둑으로, 천하에 큰 이름을 떨치기는 고사하고 수적질 따위나 하면서 평생을 늙을 것인가? 천하의 백성들이 양양성의 곽대협이라고 하면 영웅으로 모신다. 네게 재주가 있다면 어째서 한 몸을 바칠 생각을 하지 못하느냐."

뇌백지는 다시 한 번 주먹을 내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선비를 치지 않았다. 주먹은 뱃전을 떄렸고, 다시금 배가 가라앉을 듯 출렁거렸다.

뇌백지는 짐승같은 소리를 내면서 그가 타고왔던 조그만 배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부하들이 작은 배로 옮겨타기도 전에 조그만 배의 노를 미친 듯 젓기 시작했다. 그가 한 번 휘저을 떄 마다 배가 몇 장씩 미끄러져가더니, 불과 잠깐 사이에 뇌백지를 실은 배는 강변에 도착했다. 뇌백지는 뭍으로 뛰어내리더니 경신술을 발휘해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배에 남아있는 좀도적들은 노선비를 바라보며 어쩔 줄을 몰랐다. 그들이 주춤거리는 사이 청년이 다른 사람들을 이끌고 황남산과 변홍지를 공격해서 쓰러뜨렸다.

그제서야 노선비는 큰 기침을 지으면서 선실로 들어갔고, 버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

이 노선비가 바로 북수사인 조아벽이다. 그는 송나라 조정에서 최고 벼슬에 올랐으나 조정의 간신들에 의해 결국 귀양을 가게 되었다. 임금의 총애 덕택에 귀양은 금세 풀렸다. 하지만 노선비는 조정에서 자신이 뜻을 펼칠 수 없음을 알고 그대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송나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어, 그의 문하 제자들이 많지도 않았으며 그 제자들도 조정에 들어가서 뜻을 펼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번에 양양성이 어려운 지경에 이르게 되어 곽정이 다시 한 번 영웅첩을 돌렸다. 천하 영웅들이 다시 한 번 일어나 몽고의 공격으로부터 양양성을 막아내자는 뜻이었다. 조아벽은 무림의 인물이 아니었지만 평소 곽정의 명성을 충분히 들었다. 송나라가 이제 바람앞의 등불과 같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조아벽은 무덤을 찾아가는 심정으로 네 명의 제자를 끌고 양양성으로 향하던 중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먼저 강을 건너고 조아벽과 제자인 유탁관 두 사람만 배를 건너다가 하필이면 수상에서 뇌백지를 만나 봉변을 당한 것이다.

조아벽은 그 스스로는 무술을 조금도 모르지만 제자들 가운데에는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 많았다. 또한 도학의 스승과 무공의 스승은 달라, 여러 제자는 모두 다른 무공을 배우고 익혀 서로의 장점을 교류하고 고련했기 때문에 무학 명가라고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만큼 솜씨가 뛰어났다.

배에서 황남산을 제압한 유탁관으로 말하자면 어렸을 때 대리국의 주자류에게 글과 무공을 모두 배웠다. 유탁관은 무술이 빼어나지는 않고 대신 글읽기를 즐겨서 스승의 꼬장꼬장한 성품을 많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그가 배운 무공 자체가 워낙 명가의 무공이라서, 그다지 높지 않은 솜씨로도 황남산 같은 삼류의 무사를 이기는 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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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별 | 2007/01/01 20:51 | 글쓰기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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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포우 at 2007/01/02 20:03
오우 곧 양과도 등장할 듯한...^^
Commented by 찬별 at 2007/01/02 21:39
글쎄여;; ^^
Commented at 2007/01/03 16:03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찬별 at 2007/01/03 23:39
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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