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칠은 급한 김에 쿠데타를 일으켰는데, 그게 아무런 준비도 없고 앞뒤 잴 것도 없이 무턱대고 일으킨 쿠데타였다. 역설적으로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무계획적으로 일으킨 쿠데타였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킨 그 스스로조차도 허탈할 정도로 너무도 쉽게 성공해버렸다. 이것은 마치 처음 고스톱 배운 사람이 돈을 쓸어가는 것과 비슷한 판국이었다. 만약에 그가 조금이라도 사전에 준비를 했다면, 쿠데타를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김정알의 눈을 피해가지 못했을 것이다. 김정칠은 대인민 담화를 하고, 외신에 북한의 정권 교체를 통보하면서도 자신의 성공이 믿어지지 않았다. 휴전선을 원산까지 물리라고 하면서도 본인이 그런 지시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지도자 동지." 문을 열고 김정팔이 들어왔다. 바로 엊그제까지 대남공작부 부장에 불과했던 김정팔은 김정칠의 등극과 더불어 일약 당 비서관이 되었다. "무슨 일이야? " "강원도 지역 주민들의 반발이 극심합네다. 특히 원산 지역 에미나이들하고 함경도 내기들이 말썽입네다. 죽어도 고향을 못 떠나겠다고 그럽네다." "미친 놈들, 혁명 정신이 부족해서 그렇다. 북조선이 언제부터 지들 마음대로 하는 나라였나? 결혼도 당에서 지정해준 남녀끼리만 할 수 있고, 집도 당에서 지정해준 집에만 살 수 있고, 여행 한 번 갈라면 관청 도장을 열다섯개나 찍어야 한다고 교과서에서 배우지 않았나? " "무슨 말씀입네까? " "아, 참 남한 교과서하고 착각했음. 아무튼간에 그 반발하는 종자들은 전부 아오지 탄광에 쳐넣으라우." "죄송합네다만, 아오지 탄광 수용 인원이 넘칠 것 같습네다." "그 옆에다 탄광 하나 더 만들라우." "예. 알겠습니다. 거기는 아육지 탄광이라고 할까요? " 김정팔은 자신의 농담이 실패했음을 깨닫고 짐짓 인상을 진지하게 찌푸렸다. 그런데 이 때 비서관실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이보게-. 나 후안무치다 이거." 김정칠의 얼굴이 순간 긴장으로 바싹 굳었다. 김정칠은 머리 회전이 빠른 편도 아니고 탐욕도 심한 편이지만 아주 바보는 아니었다. 북조선의 정권 장악을 위해 최소한 중국과 미국, 그리고 남한과 일본의 눈치는 봐야 했다. 공식적인 테이블이 아닌 뒷선을 통해서 쿠데타 계획에 대한 최소한의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는 위험했다. "어 오랜만이올시다." "어쭈, 인제 많이 컸다 이거. 반말이냐 이거." "머 둘 다 국가원수니 동급 아니냐 이거지. 아무튼 차츰 연락 할려고 했는데 웬일이요? " "다름아니라 김정알이가 지금 중국에 있는데, 자꾸 날더러 자네 좀 어떻게 치워달라고 보챈다이거. 내가 도와주면 백두산을 주겠다나 뭐래나." 김정칠이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서? " "그런데 나도 사실 군대 이끌고 움직이고 그러기 싫거든. 왜 역사와 전통도 있잖아. 우리 사람이 괜히 군사 이끌고 나갔다가는 청천강하고 살수에서 백만대군이 전멸만 당할꺼고..." "음." "아 뭐 그건 그렇고. 나는 신의주에 별장 한 채 지어놓고 신선놀이 좀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더라." "천천히 고민해볼테니 나중에 이야기합세다. 지금 내가 바빠서 말이지." "나같으면 내 전화가 제일 바쁠 것 같은데, 뭐 바쁘다니 일단 알겠다우." 김정칠이 전화를 내려놓으면서 욕지거리를 뱉았다. 중국에 가있는 김정알이 어떻게든지 야료를 부리고 복귀를 꿈꾸리라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땅을 중국에 갖다 바치면서까지 그런 짓을 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자기 자신도 강원도 땅을 장영자에게 갖다 바치기 위해서 일으킨 쿠데타이긴 했는데, 본인은 그 사실을 깜빡 잊었다) 아무튼 이 전화를 받은 뒤 김정칠의 짜증 게이지 100. 이 떄 정몽규가 전화를 했다. "아주 축하드립니다. 김정칠 동지. 저는 남한의 횬다이 그룹 총수인 정몽규입니다." "그렇소? 반갑소." "위대하신 김정칠 동지가 대권을 차지하게 되었음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하하 그까짓껄 뭐." "다름이 아니오라. 이번에 휴전선을 북쪽으로 물리신다는 판단을 조금 재고해보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그 처사로 인해 횬다이 금강산 관광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므로 저희가 투자한 자본의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 "한낱 기업가 주제에 내게 충고를 하시오? " "아니오. 충고라니요. 가당치 않습니다. 다만 그렇다면 금강산 지역의 소유권을 저희에게 넘겨주실 수 없나 해서..." 거래에 의하면 금강산은 장향자의 땅이다. 김정칠에게는 아무 권한이 없는 땅이다. 권한이 없는 일에 대한 요청은 짜증나는 일이다. "그건 나는 모르는 일이오." "아니, 모르신다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떻게합니까, 만약에 그러신다면 저희는 저희가 북한에 투자한 모든 자산을 회수해가겠습니다." 사실 이 말은 아주 두려운 말이었다. 남북의 경제 협력 이후로 많은 남한 자본이 북한으로 투자되었지만, 그 가운데 횬다이의 투자 액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이 가운데에는 언론에 밝혀지지 않은 비공식적인 투자 액수가 훨씬 더 컸고, 그 투자액들은 대부분이 북한의 기간산업, 예를 들면 고속화도로나 고속철도, 발전소, 인터넷 등에 투자되었다. 물론 기업가들이 이윤없이 움직일 까닭은 없었다. 정몽규에게 있어 통일 후의 기업 재도약도 중요한 목표였지만, 그보다도 가장 큰 목표는 북한 내 부동산의 사전 확보였다. 실제로 정몽규는 북한 내의 일부 영토에 대한 토지 소유권을 암묵적으로 약속받은 상태였다. 정몽규로서는 투자자금을 회수하겠다는 말이 가장 강력한 카드였다. 하지만 그 카드는 김정칠에게는 분노만 치밀 뿐 약빨이 먹히는 카드는 아니었다. 김정칠은 무역이나 산업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며, 그래서 횬다이의 자금이 북한에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런 씨발, 회수할테면 회수해 가. 어디다대고 협박이야? " 김정칠이 욱하는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를 지르면서 전화기를 쾅 내려놓았다. 김정칠의 짜증 게이지는 6000이 되었다. 김정칠이 혼잣말을 했다. "아이 씨발, 왜 이렇게 갈구는 사람이 많아."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갑자기 자강도 도지사의 전화가 급박하게 울렸다. "왜 그래? 뭐야? " "아오지 탄광에서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메이 오드래? 거기 갇혀있는 놈들 다 죽어도 싼 빨갱이들 아닌가? " "빨갱이...는 아니고 악질 반동분자들입니다." "빨갱이나 반동분자나 그게 그거지. 다 쏴 죽여버리면 간단한 걸 무슨 보고까지 하고 그러나?" "그게... 무기를 탈취당하는 바람에그 지역 병사들은 완전히 제압당했습네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김정칠의 짜증 게이지가 84000이 되었다. "전차부대 뒀다 뭐하나. 가서 다 뭉게버리라우." 김정칠이 전화를 쾅 하고 끊었다. 그러자마자 이번에는 함경북도 도지사에게 전화가 왔다. "요덕 수용소에 폭동이 났습네다." 그 전화를 받는 순간 마침내 김정칠의 짜증 게이지가 만땅이 되었다. 김정칠은 전화기를 획 집어던졌다. 전화기는 벽에 날아가서 불꽃을 튀면서 박살이 났다. 김정칠이 김정팔을 불렀다. "이봐,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겠나? " * 김정팔은 고위 당원이라고는 했지만 스스로의 앞날이 전도양양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사실은 더 이상 출세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자식들은 앞가림을 하게 되었고, 그 자신은 고급스러운 의식주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만하면 평안하게 늙어가기 괜찮은 조건이다. 그런데 뜻밖에 그의 직속 상관인 김정칠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졸지에 북한 내 제 2의 실력자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김정팔에게는 반갑기만 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역쿠데타가 일어난다면, 김정칠이 실각한다면, 자신의 운명은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다. 김정팔은 김정칠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바로 엊그제까지도 그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물론 극비리에 추진할 수도 있기는 하지만, 최소한 쿠데타 내각의 2인자에게는 뭔가를 이야기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불과 하룻저녁에 쿠데타를 결심하고 실행으로 옮기기까지는 무어라도 동기가 있었을 것이 아닌가. 김정칠은 최고위 당원이지만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순하고 무식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 하나만큼은 인정받을만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앞뒤 가리지 않는 추진 때문에 낭패를 본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사실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남북간 해상에서 총격전이 벌어졌을 때 미사일을 발사한 적도 있고 (다행히 그 미사일이 중국산이라서 폭발하지 않고 바다에 빠졌다) 일본인 억류 문제로 외교 마찰이 생겼을 때 일본 대사관을 향해 수류탄을 집어던진 일도 있었다. (역시 그 수류탄이 중국산이라서 빠지지 않는 안전핀에 손가락이 걸려 손가락만 심하게 찢어지고 말았다.) 그런 다혈질의 김정칠이 복잡한 사정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주 단순한 이유로 앞뒤 가리지 않고 무턱대고 일으켰으리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만큼 한치 앞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김정칠의 행동은 마치 럭비공 같아서, 뚱딴지같이 무슨 일을 벌일 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한 김정칠이 향후에 자신의 위치까지 염두에 두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김정팔은 자신의 앞날을 스스로 걱정해야 했다. 김정팔은 재빠르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았고, 그 결과 그가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빠르게 결정했다. 김정팔이 말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역사로부터 배울 수 있습네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찾는 것입네다." "무슨 교훈인데? " "도요도미 히데요시 상이 옛날에 전국을 통일한 뒤 일본 내 반대세력을 잠재우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바로 외국을 침략한 것입네다." "그래서, 지금 내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배워야 한다고? " "예, 그렇습네다." "이런 죽일 놈, 일제 강점 36년이 지난지 얼마 되었다고 나보고 쪽바리한테 뭘 배우라고? 이 친일파 매국노 같으니." 사실 짜증 게이지가 팔만사천쯤 되었을 때는 무슨 말을 들어도 다 짜증이 나기 마련이었다. 김정칠은 권총을 뽑아서, 그 자리에서 김정팔을 쏘았다. - 탕 - 으악 김정팔은 머리에 구멍이 뚫려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김정칠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피를 보고 나니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김정팔이 죽어가면서 한 말이 그럴 듯 했다. "역사로부터 배운다... 역사로부터 배운다... 그거 좋은 말이구만. 그래서, 어딘가를 침략한다? 어디를 침략하지? " 죽어가는 충신의 마지막 조언....은 아니었지만, 김정칠은 김정팔의 말이 들을 것이 있다고 느꼈다. 2. 거짓말을 오래 하다보면 자기 스스로도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넘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느날부터 술이 싫다고 떠벌리고 다니다보면 어느날엔가는 술에 약해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싸움이라면 담을 쌓은 사람이라도, 맞아도 아픈 척 하지 않다보면 어느 순간 맷집의 제왕이 되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식으로 거짓말이 결국 자신을 속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원동권은 대학을 그만두고 노동 현장에서 계약직 노무자로서 근무하다보니까, 어느 순간 자신이 위장취업을 한 대학생이라는 사실을 잊게 되었다. 원래부터도 사회 최하층민이었고 또한 하루벌어 하루먹기가 힘든, 앞날에는 절망 밖에는 놓인 것이 없는 학벌 짧은 비정규직 노무자라고 스스로를 완벽하게 세뇌시킨 것이다. 그러다보니 자신이 원래 학생이었다는 생각은 이미 깜빡 잊은지 오래였다. 그러던 상황에서 목포가 오물의 도시가 되는 바람에 도시 전체의 경기가 가라앉았고, 그래서 그는 목포의 하수구를 기어다니던 그 직업을 잃었다. 어차피 하수도를 파고 다니던 그의 입장에서는 도시의 냄새가 크게 바뀐 것도 아니었으므로, 목포가 암흑도시가 된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튼간에 그는 직업을 잃었고, 실의와 좌절의 몇일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십장인 최씨가 희소식을 전해왔다. 서울의 구로 디지털 단지에 입주한 횬다이 그룹에서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이었다. 함께 하수도에서 일하던 권씨 등 한두 사람은 고향을 떠날 수 없다며 자리를 사양했지만, 최씨, 박씨등은 모두 이게 왠 떡이냐며 서울로 상경했다. 원동권 역시 마찬가지였다. 횬다이 그룹에 취업을 하게 된다면 밝은 미래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전통적으로 노조의 위력이 강하고 노무자의 복지가 훌륭한 횬다이 그룹에 취업하게 되면, 정년이 보장될 뿐만 아니라 어지간한 대졸자보다 훨씬 높은 급여를 받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올라왔더니 현실은 달랐다. 횬다이 그룹의 계열사가 아니라 횬다이 그룹의 계열사의 하청업체에 물건을 납품하는 회사에 자재를 공급하는, 그러니까 계약의 <갑> <을> <병> <정> 관계에 있어 <정>에 위치한 회사였다. 약 삼십명의 공장 직원이 햇볕도 잘 들어오지 않는 공장에서 박봉을 받으며 하루종일 일하는 그런 곳이었다. 열악한 근무 환경에서 힘든 일을 사나흘 간 하던 원동권이, 그곳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은 이유는 회사의 경리 아가씨 덕택이었다. 여상을 졸업한 박미자는 아주 예쁘지는 않지만 피부가 희고 말씨가 고운 아가씨였다. 수줍음 많은 두 사람은 보름 가까이 서로 호감만 가진 채 말도 못 건네다가, 용기를 낸 원동권이 영화표를 먼저 두 장 구입한 뒤, 박미자에게 슬그머니 영화를 보러 가자고 말을 건넸다. 그것이 그들의 데이트의 시작이었다. 사랑에 빠진 원동권에게 세상은 아름답기만 했다. 프톨레타리아 혁명도, 북한의 쿠데타 소식도, 모두가 그의 관심 거리 바깥에서 생겨나는 일들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박미자 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박미자의 환심을 살까, 박미자의 마음에 애틋한 사랑의 씨앗을 뿌릴까, 그녀의 가녀리고 흰 손목을 잡을까, 빨갛고 도톰한 입술에 입을 맞출까, 여리고 흰 목줄기와 쇄골뼈를 어루만질까, 풍만한 젖가슴을 어루만질까, 그 끝에 (아마도 분홍색일 것이 분명한) 젖꼭지를 입안에 넣고 혀끝으로 부드럽게 애무할까, 그 혓바닥을 민활하게 타고 내려가서 배꼽 주변을 애무할까, 살집이 풍만한 허벅지 사이에 손을 집어넣고 손가락 끝으로 음모를 휘감아 잡아당길까, 그런 다음 혀끝을 타고 내려가서 다리 사이에 혀끝을 가볍게 대었다가 떼었다가 할까, 이어서 자신의 몸에서 튀어나온 부분을 박미자의 몸에서 쑥 들어간 부분에 집어넣고 피스톤 운동을 3-4회 가볍게, 1회 깊게 반복할 것인가... 등에 대한 관심 밖에는 없었다. 물론 그것들은 모두가 미래, 아주 미래의 일일 뿐이었다. 아직까지 원동권은 그녀의 손목도 제대로 잡아본 적이 없었다. 모든 것은 이제 미래의 일일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 영화를 보러 가기로 했다. 원동권은 오늘이야말로 그녀의 손목을 잡고 말겠다고 다짐했다. 어두컴컴한 극장의 뒷자리라면 그녀의 손목을 잡는 것은 아무 문제 없을 것이었다. 혹시라도 무서운 장면이라도 좀 나와준다면, 그래서 그녀가 비명을 지르면서 안긴다면, 더욱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 생각을 한 원동권은 영화관에 개봉된 영화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으로 알려진 것을 골랐다. 그 제목은 <한니발 라이징>. 그런데 영화는 무서운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피를 흘리고 살가죽을 벗기고 눈알을 도려내서 삶아먹는 류의, 혐오스러운 영화였다. 박미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고, 박미자의 불편함은 원동권의 괴로움이라 원동권은 꼼짝할 엄두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필름이 멈추었다. 영화 방영이 갑자기, 불시에 멈춘 것이다. 이게 뭐야- 하는 고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원동권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이 컴컴해서 박미자의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그녀 또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느낌을 전해받았다. 영화는 금방 재개되지 않았고, 안내 방송 또한 없었다. 사람들이 하나 둘 일어서서 큰소리로 항의를 하는데, 박미자가 원동권에게 먼저 말했다. "영화 너무 끔찍했어요." 순간 원동권은, 그녀의 말투가 너무도 애처롭게 들렸고, 그래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게다가 영화관은 아주 캄캄했다. 비상등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암흑 속. 원동권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목을 껴안았다. 여자가 헉- 하는 한숨을 내쉬었다. 원동권은 그 한숨이 더욱 가슴의 피를 뜨겁게 덥히는 것을 깨달았다. 원동권은 그녀를 힘껏 껴안고,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입술로 덮었다. 따뜻하고 감미로왔다. 극장 안은 어두컴컴했지만 원동권은 눈앞에서 불빛이, 별빛이, 달빛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이 한꺼번에 피고 지고 반짝이는 것 같았다. 원동권은 눈을 감았다. 사람들의 와글거리는 소리가 차츰 귀에서 멀어져가고, 그는 하늘위로 둥실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의 품안에서 바둥거리는 여자의 움직임에 원동권은 온몸의 피가 뜨겁게 쏠리는 것 같았다. 그때 박미자의 말소리가 들렸다. "볼때기 살을 뜯어먹는 거 너무 끔찍했어요. 무슨 돼지목살처럼." 원동권이 깜짝 놀랐다. 분명히 박미자의 입술을 자신의 입술로 막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저렇게 또렷하게 말을 하지? "동권씨? 어딨어요? 깜깜해서 안 보여요." 원동권은 순간 자기가 누군가를 잘못 껴안았음을 꺠달았다. 원동권은 얼른 품에 있던 여자를(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몸이 왜소한 남자였다) 밀어버리고 박미자의 말소리가 들린 곳으로 갔다. "나가야겠어요. 뭔 일인줄 몰르겄지만 나가서 환불을 받든가 히서 다른 것을 보믄 되겄지라.하하하." 원동권이 박미자의 손목을 붙들고, 더듬더듬 바깥으로 나왔다. 야광 표지판만 간신히 보일 뿐, 비상구 지시등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속을 간신히 더듬어 나왔다. *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북한의 쿠데타와 관련한 담화를 드리겠습니다." 노주현 대통령은 잔뜩 목소리에 힘을 주고 카메라를 응시하며 말했다. 사실 북한의 쿠데타 발생 이후 지난 세 시간 가량이 지났지만, 생산적으로 진행된 일은 별반 없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각 부처 장관들을 한 시간 이상 붙들고 조졌으며, 다시 약 한 시간 가량을 야당 후보들과 함께 정치 모략이네 어쩌네 하는 싸움을 했을 뿐이다. 그러나 아무튼 상황이 이러니 대국민 담화를 하기는 해야했다. 그런데 노주현이 한창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하려고 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촬영을 위한 조명이 일시에 꺼졌다. 마이크와 스피커도 전원이 나가면서 퍽- 퍽- 하는 소리가 났다. "정전인가? " 청와대 운영실은 황급히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한국전력의 전력선 이상에 따른 국지적 정전이며 복구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대답만 얻어냈다. 청와대 운영실은 황급히 긴급 발전기를 돌렸다. 청와대의 긴급 발전기는 민정경찰에 의해 한 달에 한 번은 재물조사를 엄격하게 받아서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원래 아무리 준비를 잘 해놔도 막상 쓰려면 고장나는 법이다. 삼십분 이상을 뚝딱거리고서야 간신히 발전기가 돌아가고 조명이 밝아졌다. "국민 여러분. 지금 북한의 정세가 급박하여..." 대통령이 다시 연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서울에 거주하는 시민의 대부분은 이 연설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때 발생한 정전은 청와대 인근 지역에만 국지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서울시 전체에 한꺼번에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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