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1월 27일
본격 칙릿소설 -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6)
#5.
“자, 그러니까 대통령 공약사항에서 말하는 행정 개편과 실제 대통령이 생각하는 행정 개편체계는 다를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보고서의 기본 기조로 삼고 있던 행정의 효율화에 대한 관점은...”
팀장이 칠판에 열심히 자신의 생각을 후려갈겼다. 지금 시간은 오후 두 시. 이종민은 지난 일주일 내내 밤 열한시가 넘어서 퇴근했다. 잠이 모자랄 정도로 일이 많다. 오후가 되니 일주일간의 피로가 밀려왔다. 손발은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머리속엔 돌이 가득 찬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번 보고서에서 대통령 공약사항의 지향점과 대통령의 실제 지향점은 매우 달라 보이지만 사실 서로 다르지 않다는 논리를 개발하고, 동일한 전략적 방향성으로 얼라인 된다는 사실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임 장관은 본 사업의 예산 집행을 중지할 위험이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 고객도 다치고 우리도 다치는거지.”
이종민은 졸린 눈으로 칠판을 바라보았다. 듣고는 있지만 들리지 않았다.
이종민은 처음 컨설팅 회사에 채용되었을 때 날듯이 기뻐했다. 대학시절 내내 가슴속에 품어왔던 꿈의 직장. 검은 양복에 흰 와이셔츠, 반짝이는 금테 안경을 끼고, 날카로운 직관과 뛰어난 문제 해결 능력으로 경영자의 고충을 한 순간에 풀어주는 해결사.
바로 그 컨설턴트가 되고난 이후 얼마동안은 이마에 <나는 컨설턴트요>라고 써붙이고 다니지 못해서 안달이었다. 그는 홈쇼핑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면서도 직업 란에는 꼬박꼬박 <컨설턴트>라고 써넣었다. 그는 첫 달의 월급을 톡톡 털어 휴고보스의 블랙라벨 정장과 에르메스의 넥타이, 해밀턴 와이셔츠, 그리고 듀폰의 커프스버튼을 구입했다. 그리고는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흐뭇했다.
그 때만 해도 자신이 할 일이 이런 한심한 일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입사 후 삼년이 지난 지금, 그는 자신의 직업에 대한 환상을 대부분 깨뜨렸다. 일단은 컨설팅 회사라고 다 똑같은 컨설팅 회사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전세계적인 컨설팅회사가 있는가하면, 컨설팅 회사라고 이름은 붙였지만 사장의 인맥을 통해 눈먼 돈이나 따먹고 다니면서 직원들 등골 빼먹는 회사도 있었다. 그가 다니는 회사는 후자에 속했다.
고액 연봉은 커녕 동갑내기 은행원보다 월급이 적었고, 근무시간은 끝없이 길었으며, 하는 일은 어지간히도 한심했다. 지금 하자는 일이 뭔가. 대통령 공약사항이 사실은 뻥인데, 뻥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라는 것 아닌가.
“자, 지금까지 이야기를 이해했으면 김 부장은 그 보고서 초안 잡아 놓으세요. 이종민씨, 출발 준비 다 됐나? ”
박 이사가 이종민을 돌아보며 물었다. 김 부장의 팀에게 보고서를 맡겨놓은 뒤, 박이사와 그는 공공정책국장을 모시고 등촌18동에 인터뷰를 나가야 한다. 세 사람은 모두 조금씩 인터뷰를 나가는 목적이 다르다.
공공정책국장은 아무튼 자신이 하고 싶은 방향대로 일을 추진하겠지만 <공청회를 해서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했다> 라는 절차가 필요했고, 박이사는 국장을 밀착마크 하면서 최대한 영업 기회를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종민은 인터뷰를 통해서 보고서에 쓸 말을 한 마디라도 건져야 했다. 현장에서 백 마디를 하면, 가장 써먹기 좋은 한 마디만 인용해서 보고서의 신뢰도를 높이는 전략이다. 세 사람 모두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아 한심해.
일이 한심하면 가오라도 제대로 나야 한다. 하지만 불행히도 공무원을 <모시고> 하는 일은 가오 조차 제대로 나지 않는다. 공무원에게는 컨설턴트건 뭐건 <하청업체>일 뿐이다. 공무원을 잘 모시고 다녀야 하고, 뭐라고 한 마디 하면 설설 기는 시늉을 해야 한다. 오늘 하루도 또 그 시늉을 해야 한다. 아, 한심해. 내용도 없고 가오도 없는 일을 하러, 나는 오늘도 간다.
“준비 다 됐습니다.”
“그럼 갑시다.”
이종민은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오늘 하루도 또 한심한 하루가 되겠지.
# by | 2009/01/27 01:20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4)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어쩐지, 이종민씨가 하는 일이 제가 하는 일과 너무 흡사해서, 양심에 푹, 하고 가책이 느껴져서 댓글을 달고 있네요;;;
심지어 그럴싸한 컨설턴트라는 이름도 아니고 대학원생 나부랭이라니 ㅠㅠ
얼마전에 군청 가서 열심히 굽신거리다 온 제 모습과 완전 똑같아요 ㅠㅠ
슬픕니다, 슬퍼요;;;;
암퉁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