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 칙릿소설 -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9

#9. 


이마에 반창고를 붙힌 국장은 술잔을 높이 치켜들고, 짐짓 너털웃음을 지으면서 위하여를 외쳤다. 국장이 먼저 앞장서서 소줏잔을 통째로 털어넣자, 마주앉은 구청장과 과장 등이 함께 잔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공무원도 공무원 나름이겠지만, 요즘은 웬만해서는 예전처럼 먹고 죽자고 술을 마시지는 않는다. 특히나 중앙부처 국장쯤 되는 사람은 함께 술 마시는 사람도 가려야 한다. 사업자와 먹었다가는 특혜 의혹이, 지방 공무원과 먹었다가는 편애 의혹이, 룸싸롱 마담과 함께 마셨다가는 세컨드 의혹이, 마누라와 함께 마셨다가는 못난이 의혹이 일 수 있다. 아는 미술관 관장과 함께 먹었다가는 자칫하면 다음날 그 미술관 관장의 누드 사진이 조간신문 일면에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이 어떤 날인가. 중앙부처의 이사관급의 고위공무원이 일개 천한 백성에게 마빡을 까인 날이다.  이사관급 고위공무원은 1983년, 고등학교 2학년때 도시락 반찬 뺏아먹던 같은 반 양아치와 말다툼 끝에 열라 맞은 후 25년만에 남에게 마빡을 까인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의 모범생이면서도 까인 울분은 술로 풀었는데, 지금이야 어떨까. 일차로 소주로 소독하고, 이차로 맥주로 씻어낸뒤, 삼차로 폭탄주에 계곡주에 마빡주 등 가지각색의 미친 짓을 다 해야 까인 곳의 염증이 사라지지 않을까.


아무튼 국장이 이마를 까인 덕택에 박진희는 신이 났다. 세상에 회식 좋아하는 직장인은 없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은 회식 좋아하는 직장인도 꽤 존재한다. 직장 내부에서 인간관계 무난하고, 성격 괄괄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밝은 성격의 사람들 중에 그런 사람이 많은데, 박진희도 그 중 하나다. 대충 해물탕이나 한 그릇씩 먹고 끝날 줄 알았던 회식이 고기파티로 바뀌자 박진희는 신이 났다. 


"아이고, 이게 얼마만에 먹어보는 삼겹살이냐. 나나야, 많이 먹어라."


박진희는 삼겹살 한 조각을 김나나에게 건네주고, 자신도 큼직하게 두세  조각을 상추에 싸서 쌈장을 듬뿍 찍었다. 그러고는 입 속으로 우걱우걱 우겨넣었다.


물론 죽지 못해 직장을 다닐 뿐, 직장 내부 인간관계가 그다지 무난하지 않을 뿐인 김나나는 회식이 싫다. 비계덩어리 삼겹살도 싫고, 고기 굽는 냄새가 옷에 배는 것도 싫고, 위하여를 외치며 들어올리는 소주잔도 싫다. 이런 회식 자리에 앉아있다는 것 자체가 싫다. 그나마 직장생활 이삼년을 하고 나니 지금은 어떻게든 버티고 앉아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타의라고만 할 수는 없다.


"많이 좀 드세요. 괴기 익어요."


박진희는 두툼한 삼겹살 한 줌을 깻잎에다가 척척 싸서 컨설턴트, 이종민에게 내밀었다. 이종민은 일순 당황했으나, 박진희의 푸근한 태도에 고맙다며 고기를 받아들어 입에 넣었다.


"아이구 잘도 드시네. 근데 그나저나 양복 진짜 좋으시다. 얼마짜리에요? "


"얼마 안 합니다."


"비싼 양복 같은데 입고 있으면 괴기 냄새 배니까 일루 주세요."


"아니, 괜찮습니다."


"괜찮기능 뭐가 괜찮아, 일루 줘요. 걸어드리께."


"아, 괜찮은데..."


"근데 컨설턴트 총각은 결혼 했어요? "


"아뇨, 아직이요."


"엄마야, 총각이네. 우리 여기 처녀들 많아요."


박진희는 존댓말과 반말을 거침없이 섞어가면서  이종민을 휘어잡았다. 사실 이런 식으로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주로 정신박약 노인을 상대할 때 하는 것이기는 하다.


그러니까 김나나와 이종민은 미관말석들이 앉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상석에는 복지부 국장, 복지부 과장, 구청장, 이런 사람들이 앉아있고, 대충 중간쯤에는 구청의 주민과장, 동장, 팀장, 이런 사람들이 앉아있었다. 그리고 가장 말석에는 박진희나 김나나를 비롯한, 딱히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누구와 인사를 틀 필요도 없이 밥만 맛있게 먹으면 되는 사람들이 앉았다. 컨설턴트는? 고참 컨설턴트인 박이사는 복지부 국장의 수행원 자격으로 가장 고위급의 좌석에 비비고 앉았다. 재수 좋으면 구청장 한테도 사업 하나 물어올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짬밥 없는 이종민은, 혼자 멀뚱하게 공무원들 한 가운데에 떨궈진 것이다.


이 상황은 이종민으로서도 불편하고 곤혹스러웠다. 지금 그의 상황은 적진 한 가운데 떨어진 이등병이었다.  그의 입장에서 사방에 모여앉은 사람들은 모두가 고객이다. 친구나 선배가 아니고 고객인데,  나이가 서른 언저리인 것 같고, 학력 수준은 조금 낮아보인다. 이런 여자들과 무난하면서도 공통의 관심사가 뭐가 있을까? 주식, 경제, 재테크 ? 그런 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여자들은 별로 없어보인다. 소녀시대, 원더걸스? 아마도 여자들이니 별 관심이 없겠지. 군대, 축구? 그런 이야기 잘 못 꺼냈다가는 맞아죽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아내의 유혹 같은 화제가 짱일텐데, 불행히도 이종민은 그런 드라마를 잘 보지 않았다.


누굴 붙들고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있을 수도 없었다. 이종민은 컨설턴트의 가오를 좀 세워보기로 마음먹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나라 복지 현장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

이종민이 묻자, 박진희가 대답했다.

"할머니들이 벗을 때 벗더라도 좀 씻고서 벗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아까 구청장님때문에 다 이야기를 못 해서 그렇지, 아주 그냥 오징어냄새에 치즈냄새에 똥냄새에... 환장을 한다니까요. 새우젓 냄새에다 어리굴젓 냄새에다..." 

이종민이 더 이을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박진희가 할머니의 냄새에 대하여 갖은 형용사를 덧붙여 수식하고 있었다. 이종민은 결국 영양가 있는 이야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박진희가 영양가 없는 소리를 떠들어대주는 것이 고마웠다. 이 여자와 적당히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다고 생각한 이종민은 짐짓 너스레를 떨며 대화에 끼었다.


"컨설턴트 총각은 어떤 여자가 좋아요? "


"저는 치마만 두르면 다 좋습니다. 하하하하."


이종민은 최근에 배운 사회생활의 스킬, 재미없는 농담 하고 큰소리로 웃기를 시전했다. 서로 예의를 차려야 하는 사이에서는, 무난한 농담과 그에 잇다르는 큰 웃음은 나름대로 효과가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여자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그런 류의 농담이 통할 리 만무했다.


"그래도 좋은 스타일이 있을 것 아냐. 여기 처녀들 많으니까 제대로 말해야돼."


은근슬쩍 반말로 바뀐 박진희의 채근에 이종민은 짐짓 갸웃거리는 시늉을 하다가 말했다.


"저는 솔직히 좀 세련되고 도시적인 스타일을 좋아합니다."=


"역시 컨설턴트들은 그런걸 좋아하는구나. 그럼 나는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


"어이쿠, 달도 밝다."


"까르르르르-"


"이런- 나 참, 마셔요. 원샷-! "


"죄송합니다. 제가 술을 조금 못해서..."


"그런게 어딨어! 먹어! 원샷! "


이런 식으로 술을 마시다보니 불과 삼십분 사이에 그 자리에서만 술을 네 병을 비웠다. 여자 셋, 남자 하나가 앉은 자리에서 말이다. 박진희는 괄괄한 성격 답게 술도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혼자서 근 두 병을 비웠고, 김나나와 최주희는 둘 모두 소주 반 병을 간신히 넘기는 주량이었고, 이종민도 한 병이 정량에 더 마시면 힘들어하는 사람이었으니, 테이블에 앉은 사람 모두가 과음을 하게 되었다.


"어, 취한다. 께꾹. 나 화장실 좀 다녀올께."


박진희가 비틀비틀 일어섰다. 그런데 술 잘 마시는 박진희라도 갑자기 마신 술 치고는 너무 급하게 많이 마셨다. 그는 일어서다가 자칫하면 삼겹살 불판 위로 쓰러질 뻔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최주희가 얼른 일어섰다.


"언니, 갠찮아요? "


"이 미친년아, 삼십분 동안 열 번 원샷해봐라, 갠찮나 안 갠찮나."


"아, 누가 마시랬나? 지가 쳐마셔놓고."


"언니더러 말버릇봐라, 이 미친 년이."


"몰라몰라. 나랑 같이 바람이나 쐬자."


최주희가 박진희의 겨드랑이를 끼고 나갔다. 두 사람이 비실거리며 나갔다. 같은 테이블에 김나나와 이종민, 두 사람만 남았다.



by 찬별 | 2009/03/13 00:54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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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校獸님ㄳ at 2009/03/13 00:59
엇, 김나나!! 잘 보고 갑니다. 굽신굽신.
벌써 단 둘이 있다니 (비록 주위에 사람들은 많지만)! 기대되네요.
Commented by 찬별 at 2009/03/13 01:31
감사감사
Commented by 메르린 at 2009/03/13 04:55
김나나는 아내의 유혹을 보겠죠? 안볼까요? 궁금하다..
Commented by 찬별 at 2009/03/13 11:34
김나나가 집에 혼자 있을때 뭘 하는지는 저도 잘 몰라서;;
Commented by 친절한 라니씨 at 2009/03/13 10:11
두근.. 두근...
Commented by 찬별 at 2009/03/13 11: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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