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14일
본격 가상역사소설 오서투랄리아 -#12
#12. 미선민
잔치라는 말에 나는 혹시 시두니에서처럼 비수투로에서 보리술을 마시고 재미없는 대화를 하루 종일 시달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러나 지난 몇일간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본 대로, 부리주번은 시두니와 전혀 달랐다.
제국과의 교류가 많고 상업이 발달한 시두니와 달리, 이곳은 농업과 목축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그리고 이 곳의 잔치는 시두니의 잔치와 전혀 달랐다. 마치 도시인과 농민의 잔치가 다르듯 말이다.
잔치는 마을 중심의 공터에서 이루어졌다. 쪽으로 물들인 듯 새파란 하늘, 목면 꾸러미처럼 새하얀 구름. 오늘은 다행히 조금 약하게 부는 바람. 경성의 번잡함과 전혀 다른 고요함이다.
그들은 즉석에서 양과 소 몇 마리를 끌고 와서 아주 능숙한 솜씨로 잡았다. 제국에서 천한 일로 여겨지는 목축과 도축이 이 곳에서는 생업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막상 눈으로 보니 기분이 색달랐다. 커다란 짐승들이 삽시간에 고기덩어리로 해체되어 모닥불 위로 올려졌다. 고기에서 뚝뚝 떨어진 기름에 모닥불이 더욱 흥을 내며 타올랐다.
물론 술도 있다. 막걸리와 소주는 없다. 하지만 보리술과 보리술을 증류한 독주도 있다. 시두니의 밤에, 관기가 건넸던 술과 같은 종류인 것 같았다.
모두가 어우러져서 고기를 굽고 술을 마셔댔다. 남녀를 가리지도 않았고 신분을 가리지도 않았다. 양반이나 장수를 위한 별상을 차리지도 않았고, 여자와 천민은 구석에서 몰래 먹지도 않았다. 안중근 휘하의 민병 백여 명, 마을의 남녀노소 삼백 여명, 내 부하 백 명. 짐승을 돌볼 사람 몇 명과 마을 경계를 지키는 군사 몇 명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이 모여서 벌이는 잔치였다. 모두는 한 장소에서 내키는 사람과 이야기 하고, 한쪽에서는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다른 쪽에서는 망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등이었다.
제국에서 갓 건너온 나를 비롯한 병사들 모두는 처음에 잠시 낯설어했으나 금세 적응이 되었다. 대부분이 제국에서 반골로 통하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경성의 술집 중에서 내 이름 모르면 허당이었다구. 내가 들어가면 그 술집 술 다 떨어지기 전까지는 안 나왔다니까.”
“웜메 무섭다랑. 워디 나랑 한 븐 해보겠능기랑겨? ”
“나 참, 어디 해보자. 뭘로 할까.”
“폭탄주가 뭔지 아나? ”
오철환은 말뚝만한 기관포를 등에 매고서, 안중근 휘하의 거한인 홍총각과 술싸움을 시작했다. 곰 두마리가 꿀단지를 껴안고 싸우는 듯 했다.
사람들이 큰 물통에 보리술 한 자루를 가득 붓더니, 멀리서 그 병에다가 독주를 집어던졌다. 독주 병이 보리술통 안에 빠질 때 마다 회오리 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들은 그 술을 폭탄주(爆彈酒)라고 불렀다. 술싸움이 붙은 두 사내에게 각각 한 바가지 씩의 폭탄주가 주어졌다. 누군가가 거기에다 돈을 걸기 시작했다. 안중근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그는 홍총각에게 백 문을 걸었다.
나는 취기를 잠시 식히려고 사람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초원에 누웠다. 하늘이 파랗다. 오서투랄리아의 가을 하늘은 제국 만큼 높고 깊은 맛은 없는 대신에, 색조는 비교할 수 없이 아름답다.
“제국은 얼마나 멀리 있능게랑가랑.”
여자 목소리다. 맑고 곱다. 옥돌이 부딪히는 듯 맑고 짜랑짜랑한 목소리였다. 그 여자의 오서투랄리아 사투리는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 같다.
“배를 타고 서너 달 넘는 거리에 있지요.”
“경성은 사람이 많고 번잡스럽은께렝 여그처럼 상쾌하덜 않을 것이요롱.”
“잘 아시는군요. 아가씨는 이름이 뭔가요? ”
“미선민이요롱.”
나는 고개를 돌렸다. 미선민이라고 이름을 밝힌 여인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누르면 포도알처럼 톡 터지면서 발랄한 생기를 내뿜을 것 같은 젊은 여인이었다. 나이는 열 예닐곱살? 나보다 조금 아래로 보인다. 키가 큰 편이고, 얼굴은 유리알 같이 희다. 농부의 자식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이칼라 타령하는 제국의 신여성들처럼 연약해보이지도 않는다.
“미선민. 예쁜 이름이군요. 무슨 일을 하나요? ”
“정 슨생님 댁에서 아이덜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지랑.”
“정 선생님요? ”
“정 슨생님을 모르씨여잉잉? 정필재 슨생님 말이요.”
정필재라는 이름은 모르겠지만, 부리주번에 사는 정선생님이 누구인지를 내가 모를 리가 없다. 다산 정약용이 서강에서 전래된 기독교를 신봉한 이유로 백여년 전 부리주번까지 귀양을 와서 이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으니, 분명 그의 후손일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 어떻게 그 분을 모를 수 있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미선민이 귀여워서, 나는 계속 시치미를 때고 물어보았다.
“그 분이 누구시길래? ”
“긍게니용, 아 나 참 환장하겄나랑겡. 다산 정약용 슨생님의 육대손으로...”
그녀는 가슴을 콩콩 두들겨가며 답답함을 표시했다.
그 때 였다. 갑자기 누군가가 울부짖으면서 여기저기 헤매고 있었다. 미선민이 벌떡 일어서서 그에게 달려갔다.
“호랭이 아니냥. 뭔 일이니링.”
“큰 일 났씨오롱.”
“무슨 큰 일이링? ”
“슨생님이 위독하시오옹.”
“머시여? ”
미선민이 허둥지둥 일어났다. 나도 벌떡 일어났다.
# by | 2009/04/14 04:34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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