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04월 24일
본격 가상역사소설 오서투랄리아 #13 - #14
#13. 미선민의 치료
미선민이 날쌔게 달리는데, 제국의 처녀들처럼 엉덩이만 요란하게 흔드는 오두방정이 아니다. 성큼성큼 달리는 모습이 마치 운동선수처럼 거침이 없었다. 나도 힘껏 뛰지 않으면 따라잡지 못할만큼 빠르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도로를 몇 차례 좌우로 비집고 들어가자 흰 색으로 칠해진 삼층 집 하나가 나왔다. 오래된 집이지만, 낡았다기보다 유서깊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정필재의 집이다.
사람들 몇 명이 나무로 만든 침대 곁에 모여있다가, 미선민이 달려들어오자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술냄새를 풍풍 풍기며 들어온 내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얼굴이 새까맣게 된 정필재가 누워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물풍선처럼 부풀어 있었고 좌우에 토사물을 닦은 자국이 있었다. 정필재의 아들인 듯한 나이에 비해 성숙해보이는 소년이 미선민에게 말했다.
“아칙 기침이 늦으신게롱 들어와봤더니 요로크름 쓰러지싱게랑.”
미선민은 정필재의 눈동자를 까뒤집고, 맥을 짚고, 입을 벌려 혀를 잡아당겨 보았다. 혀가 까무잡잡하다. 독한 냄새가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지? 술냄새이긴 한데, 그 속에 뭔가가 섞여 있지 않고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미선민은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더니 정필재의 입 속에 넣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은비녀가 까맣게 변했다. 독이 틀림없다. 미선민은 정필재의 아들에게 말했다.
“주영아, 어즈께 밤에 뭐를 드셨드랬냥? ”
“백인 노예덜과 술을 잡수셨는디링...”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인 노예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낯이 익다. 어제 배를 대고 들어올 때 항구에서 봤던 주정뱅이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지금 이 이른 아침시간에도 얼굴이 시뻘겋다.
“잡숫고 남은 것이 뭣이 있걸랑 가져오랑.”
“갱거루들 묵으라고 줘버렸는디요롱고롱.”
순간 정필재의 아들인 주영이 멱살을 쥐며 소리를 질렀다.
“가서 찾아와라고롱! 갱거루가 먹었으면 그 먹은 갱거루를 잡아오든지! ”
백인 노예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미선민은 정필재의 몸 이곳 저곳을 살피더니 그의 한쪽 다리에서 시선이 멎었다. 희미하나마 바늘로 찔린 듯한 흉터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미선민은 그 자리에 침으로 상처를 냈다. 검은 피가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마치 수은처럼 덩어리진 피였다. 미선민은 피가 방울진 모양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음식으로 독을 잡수신게 아니요롱. 전갈 독이용. 선생님을 엎드리게 해주씨용. 그리고 웃옷을 벗겨불고롱.”
나는 얼떨결에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사람도 많은데 하필 왜 나를 시켰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선민은 정필재의 등어리에 십자로 칼집을 네 개 만들고, 그 네 자리에 부황을 붙였다. 부황 자리에서 피가 샘솟듯이 흘러나왔다. 미선민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독혈을 닦아내고, 열십자로 찢어낸 상처 속으로 뭔가 가루를 털어넣었다.
“인자는 앞으로 지대로 눕혀주씨용. 아랫옷을 벗겨불고롱.”
누운 자세를 바꾸는데 침대 이불보 사이에서 뭔가가 기어 움직였다. 시커멓고 조그만 전갈이었다. 전갈을 보는 순간 미선민은 반색이 되었다.
“네가 슨생님을 해쳤구낭. 이제 네가 슨생님을 낫게 히드려야 쓰겄다랑.”
그녀는 겁도 없이 전갈을 집어들어 독침을 뽑아 바닥에 버리고, 껍질을 쩍쩍 벗겨냈다. 그러더니 그 껍질과 전갈의 피를 정필재의 상처 부위에 척척 이겨 발랐다.
미선민은 퉁퉁 부은 정필재의 상처 부위 주변에 몇 개의 칼집을 냈다. 그곳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부황을 뜨자 피가 아닌 맑은 진액이 흐르다가, 잠시 후에는 고름이 나왔다. 미선민은 그 곳에서 얼추 한 바가지는 될 만큼의 고름을 퍼내고서 마찬가지로 전갈의 껍질과 살을 발랐다. 그러고서 진땀을 닦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안중근이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미선민에게 물었다.
“어때? 어르신은 괜찮으시겠나? ”
“괜찮으실거용. 전갈 꼬리 독은 전갈 피로 닦으면 낫으닝게링.”
“그런데 전갈독 때문이라니. 선생님이 전갈에게 쏘이셨나? ”
“선생님이 어즈께 백인 노예들과 술을 잡수셨다고 그랬소로잉.”
안중근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백인 노예들 따위와 술이라니. 언젠가 큰 일을 당하실꺼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어도...”
안중근은 씹어 뱉듯이 말을 하고는 돌아섰다. 그의 차분하고 점잖던 얼굴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무섭게 변했다. 그의 눈이 백인 노예들을 찾고 있었다. 백인 노예 몇 사람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바르르 떨었다. 안중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지금 당장! ”
백인 노예들이 허겁지겁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14. 변절한 백인 노예
마당으로 나갈 때 쯤 안중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짐승을 몰 때 쓰는 채찍 한 자루를 뽑아 바닥을 후려쳤다. 쫙- 하면서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키가 팔척이나 되는 백인 노예들은 흙바닥에 꿇어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안중근은 그들에게 어제 무슨 음식을 먹었냐고 묻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과 함께 술을 먹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냥 채찍을 후려쳤다.
- 철썩
“아우치.”
무서운 소리와 함께 노예 두 사람이 한꺼번에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안중근은 채찍을 위아래로 흔들며 춤추듯이 내리쳤다. 백인 노예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피가 튀고 살이 묻어났다. 노예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은 제국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이 곳 오서투랄리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듯 했다.
나는 백인 노예의 면면을 보았다. 꿇어 엎어져 매를 맞고 있는 이 자들은 하나같이 칠팔척의 거구에 성성이처럼 털이 무성했다. 무지하고 기운 센 백인 노예는 거친 황무지 일에는 제격이다. 늙거나 병들어 죽은 짐승의 고기와 술찌꺼기만 먹여도 황소 같은 힘으로 꾸역꾸역 일을 해내는 자들이다.
그러다가 순간 나는 백인 노예 중 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정주영에게 욕을 먹고 어제의 음식 중 남은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그 주정뱅이였다. 순간 나는 처음 항구에 도착한 날 연기를 피우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말 한 마리를 잡아타 밖으로 달렸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그 놈, 술주정뱅이 백인 노예 어디갔나? ”
나는 질문을 해놓고도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다. 백인 노예 중에 술주정뱅이가 아닌 자가 있던가?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사람들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스티붕(獸値硼) 말이오? 저 쪽이오.”
나는 사람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불과 몇 초를 달리자 마을을 벗어났고, 다시 얼마를 달리자 황무지가 나왔다. 멀리 앞쪽에서 말에 올라탄 사람이 보였다. 거의 전속력으로 마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 자가 틀림없다.
“이럇-! ”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잠시 후 내 바로 뒤에서 정필재의 아들인 정주영과 그의 부하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나갔다. 이 말들은 하나같이 빠르다. 오서투랄리아의 공기가 말 다리에 기운을 주었는가?
우리의 추격을 깨달은 도망자도 박차를 가했다. 황무지의 지리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오전 무렵 시작된 추격전인데, 해가 머리위에 다다르도록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살을 구워버릴 듯한 남반구의 뜨거운 햇살에 대지가 데워지고, 차츰 지열이 솟구쳐 올랐다. 덩치 큰 스티붕을 태운 말이 차츰 지치기 시작했다. 약 삼사십분을 더 달렸을 때, 다리에 힘이 빠진 스티붕의 말이 돌에 걸려 쓰러졌다.
수티붕은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나려고 했다. 주영은 올가미를 던졌고, 정확하게 수티붕의 목과 한쪽 어깨를 낚아챘다. 그 순간 주영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이 달려가고, 버둥거리면서 몇 걸음 따라 달리던 수티붕이 결국 넘어졌다. 그는 오만 비명을 지르면서 흙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삽시간에 수티붕의 옷이 뜯겨지고 살갗이 찢어졌다. 그는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실수로라도 수티붕이 죽을까봐 주영을 말렸다. 그리고 수티붕을 꿇어앉힌 뒤 정수리에 칼날을 겨누고 말했다.
“너 응유엔까이와 내통하고 있지? ”
주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싹 변했다. 그럴 가능성 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수티붕은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면 삶이 보장되기라도 하는 듯이.
“거짓말 하지 마. 넌 안중근 시장과 민병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응유엔까이에게 알려줬고, 정필재 선생을 독살하려고 그 분의 잠자리에 전갈을 풀었어. 내 말이 틀렸나? ”
“그런 적 웂당께롱고롱. 지넌 그런 적 웂씨요롱고롱. 참말이지랑가랑.”
“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디 한 번 가서 보자.”
나는 그를 결박해서 마을로 데려왔다. 그냥 말 뒤에 목을 걸어서 끌고 오자는 주영에게, 이 자에게 비밀을 캐내려면 살려둬야 한다고 간신히 설득해서 말이다.
마을로 도착해서 곧 스티붕의 방과 일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여러 물건이 나왔다. 소형 전신기가 나왔고, 전신 부호 해석표, 안남술 두 병(냄새를 맡아보니 꽤 고급술이었다), 금괴 한 개가 나왔다. 술만 넉넉히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자라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증명된 셈이다.
“술 몇 병에 충성심과 영혼을 배신하다니. 썩어빠진 놈.”
스티붕의 방에서 술과 전신기가 나오자, 정주영은 금방이라도 스티붕을 살해할 듯 칼을 꺼내들고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정주영의 백인 노예를 다루는 것에 대한 태도는 부친 정필재보다는 안중근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그만두게.”
“아니, 홍 대장님은 이따우 짐승만 못한 것을 없애덜 못하그름 말리십니게랑가? ”
“목숨 붙은 것을 아껴야 한다. 죄 지은 자도 고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런 허무맹랑헌 소릴랑은 허지 마씨오롱. 공자님 절루 가라 허시던 우리 부친이 당한 일을 보씨오롱.”
“이 놈! 꼬박꼬박 대꾸하지 마라! ”
정주영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차마 드러내놓고 반항하지는 못했다. 나는 정주영을 두고 스티붕에게 다가갔다. 스티붕은 겁을 먹었지만, 내게는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물론 나도 그가 예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죄 지은 자도 고칠 기회? 그 따위 개소리라니. 백인 노예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에 감싸는 척 했을 뿐이다. 정주영에게는 본의아니게 소리를 질러서 조금 미안하게 되었지만.
# by | 2009/04/24 00:50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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