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15일
찬별의 료리강좌 - 소주, 삼겹살, 노동의 새벽
1.
하루 일과가 무척 힘들었을 때, 특히 이삼일씩 밤샘에 가까운 일을 하고서 돌아오는 길에는, 꼭 노래 하나가 떠오른다. 박노해 시, 정태춘이 노래한, 노동의 새벽이다.
전쟁같은 하루 일을 마치고서
새벽 쓰린 가슴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 하
이러다가 오래 못가지
오래 못가도 어쩔 수 없지
원가사와 조금 다를 수도 있는데, 내가 기억대로 읊조리는 가사는 저렇다.
그런 날이면 꼭 먹고 싶은 음식이 바로 소주와 삼겹살이다.
나는 소주와 삼겹살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특히 입이 짧아서 삼겹살류는 기껏해야 반인분 정도를 먹지만
몸이 물먹은 솜처럼 늘어지고 머릿속은 잘 마른 스펀지처럼 건조한 시간에는
조건반사적으로 소주와 삼겹살이 땡긴다.
2.
1차 산업 사회에서 증류주인 소주는 최고급 술이었다.
농경사회의 노동주는 막걸리였고,
사람들은 논두렁 밭두렁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농요를 불렀다.
물론 태평성대 시절에는 말이다.
흉년에는 밥도 없는데 무슨 막걸리.
2차 산업사회에서 화학적인 소주 제조법이 나왔다.
곡식 가공품의 찌꺼기 등을 화학적으로 발효시킨 술이다 .
흉년에 밥이 없어도 술을 마실 수 있는 시대가 온 것이다.
프레스공장에서 하루 16시간씩 기계처럼 일을 하던 사람들은
새벽 쓰린 연료통에 찬 소주를 채웠다.
이제 3차 산업 사회가 되어가는 중이다.
3차 산업의 술은 맥주나 와인 쯤이 되어야 할 것 같지만
놀랍게도 건설업 또한 3차산업이다.
누군가는 소주가 소주의 맛을 낼 수 있는 미니멈이 18도라던데
그래도 3차산업에도 여전히 소주는 소주지만 17도인지 16.8도인지
스무살짜리 계집아이가 사각팬티만 입고
다리벌리고 앉았다 일어섰다 꿀샷댄스인지 국민체조인지를 춰가면서
새벽 쓰린 연료통에다 소주를 채우라고 권한다.
그렇다, 새벽 쓰린 가슴에는 그래도 아직 소주다.
3.
평균 10~11시 퇴근. 개인적인 사정 때문에 일이 몰려서 아침에도 대략 8시에 출근. 어제는 새벽 세시반 퇴근. 오늘도 대략 11시 퇴근. 새벽 쓰린 가슴에 찬 소주를 붓고 싶지만 밤 열한시에 먹는 삼겹살을 소화해낼 수 있을만큼 위장이 튼튼하지도 못하고... 집에 있는 베이컨을 굽고, 고추도 조금 굽고, 오미자술 한 잔을 따랐다.

4.
그리고 노래를 부른다.
이러다가 오래 못 가지
오래 못가도 어쩔 수 없지 -_-;;;
이 노래를 정말로 진지하게 불렀던 시절이 있다.
(연봉 1억을 받기 위해서 하루 66시간씩 일하던 시절이었다)
(히스토리를 모르는 분들이 많아서 이번 낚시에도 몇 분 걸리실 듯 -_-)
요즘이 당시보다 확실히 덜 바쁘기는 하지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하루를 무덤덤하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 by | 2009/10/15 23:47 | 한국음식의 탄생 | 트랙백 | 덧글(13)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불행히 (저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죠
4. IT업계의 종사하는 분들의 애환인가요. 제 친구는 여의도에 있는 IT회사에 다니는데 평균 11시 늦으면 다음날 퇴근을 하다보니 13시간 시차에 살고 있는 제게 전화를 걸 때 시차 신경쓰지않고 걸곤 합니다. 전화를 받으면 전 자연스럽게 '퇴근하는 길이냐'곤 묻곤하죠. 가장 친한 친구인데 (사실 친구가 별로 없어서 거의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죠) 이번 3주간의 한국일정에서 한번 밖에 못만났네요. 그냥 글 읽다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르고 그렇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다른 직장들도 퇴근시간이 딱히 대단히 일러 보이지는 않아요. 한국 직장인의 애환에 가깝다는 생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