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학개그

1. 인터넷에서 시작된 자학개그 코드의 최초 용어는 <엽기> 아니었나 싶다. 엽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주로 공포스러움과 연관되는 쪽이다. 그것이 엽기적인 그녀, 이어서 딴지일보 등을 통해 <무섭도록 골때리는> 등의 의미로 쓰이기 시작했다.

엽기의 대를 잇는 말은 폐인 정도랄까. 디씨폐인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그 폐인 대장은 최근 사기인지 뭔지 혐의로 구속되었나보더만은-_; 기본적으로 폐인은 자학개그다. 20세기에 폐인이라는 말은 날자날자날자꾸나 따위를 외치는 창녀 등쳐먹는 룸펜의 이미지, 또는 제발 약 한 번만 주시면 저는 남자지만 똥꼬라도 드리겠어요 굽신굽신... 따위의 이미지를 풍겼다. 하지만 21세기에 폐인은, 걍 퇴근하고 집에 오면 넥타이를 풀고 여고생 코스프레를 하는 평범한 청년.... 정도의 이미지 밖에는 풍기지 않는다.

폐인에 이어 오덕후, 된장스러움, 등의 말도 나왔지만, 자학개그의 임팩트로 치자면 <잉여>가 거의 최고봉이다. 존재 자체의 불필요함을 이렇게 한 단어로 뭉쳐주다니. 이런 말을 찾아내는 디씨 잉여들은 역시 천재야 흑흑. 그러나 여전히 잉여라는 말에서도 20세기스런 폐인에 비하면 그저 애교가 느껴질 뿐이다. 여학생이 프린트된 베개를 껴안고 븅가븅가를 하는 모습이 아름답다고 하기는 그렇지만, 본드에 취해 레이저광선을 쏘는 폐인형 청소년들보다는 훨씬 건전하지 아니한가.

2. 영국 소설의 비비꼬인 유머의 중요한 코드 중 하나는 자학이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즐기는 스포츠인 크로켓의 지루함에 대해. 주구장창 마셔대는 홍차에 대해. 그들의 맛없는 요리에 대해. 사실은 해적이었을 드레이크경에 대해. 끝없이 농담한다.

그런 농담이 한국 소설에서 통할까, 를 생각해본다. 주영하의 신작 차폰짬뽕에서는, 일본 티비에서 본 조혜련의 오버에 대해 한숨을 쉰다. 내용인즉슨 조혜련이 시뻘건 김치찌개가 안 맵다며 고추가루를 마구마구 더 뿌려서 맛있게 먹는다는, 뭐 그런건데. 그 웃음의 코드라는 건 <한국인들은 무식하게 맵게 쳐먹어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만약 그 프로그램을 한국에서 보여줬다면, 일종의 한국식 영국유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과연 그 유머 속에 들어있는 비꼼을 보고도 한국인들이 참아낼 수 있을까?

3. 자학개그의 유행 수준은 국력과 정비례하는게 아닐까 생각한다. 영국식 유머도 있지만. 한국의 자학개그가 엽기, 폐인, 마침내 잉여로 다다르는 그 과정은 국가 전체의 경쟁력과 다르지 않다. 말마따나 1960년대의 가난은 굶어죽을 수도 있는 가난이었다. 2010년의 가난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폐인이니 잉여니 하는 지독한 수식을 붙여도 용서할 수 있다. 한편, 전통에 대한 집착 수준은 국력과 반비례하는 것 같다. 록불님의 주적인 환Q 들은 조금 예외겠지만...


by 찬별 | 2009/10/24 23:15 | 잡담 | 트랙백 | 덧글(3)

트랙백 주소 : http://coldstar.egloos.com/tb/4262016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Commented by rumic71 at 2009/10/24 23:22
뭐 별로 전통과도 상관이 없는 문제인걸요.
Commented by 늄늄시아 at 2009/10/25 07:49
자...자학개그.. -ㅁ-;; 하니까.. 그 동안 제가 쓴 비참늄늄 시리즈가 생각나네요..
Commented by 찬별 at 2009/10/27 22:58
rumic71/ 무슨 말씀이신지?

늄늄시아/ ㅎㅎ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다음 페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