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소세지



슈퍼마켓의 빨간 소세지는 그 크기만으로 주변을 압도했다. 굵기가 어린 시절의 내 팔뚝과 비슷했고, 길이는 어린 시절의 내 팔보다 길었다. 당시 야구방망이로 사용하던 빨래방망이보다 조금 더 길고 컸다. 쏘세지를 광선검이랍시고 휘두르다가 광선검에 등짝을 강타당했던 기억도 있다.  

요즘 빨간 소세지의 포장은 투명 비닐이지만 옛날에는 진한 빨강색 비닐을 사용했다. 비닐을 까면 나오는 빨간 소세지의 빛깔은 실제로는 빨간색이 아닌 밝은 분홍색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냥 빨간 소세지라고 부른다. 바나나가 껍질은 샛노랗지만 알맹이는 노르스름한 흰 색인데, 후발 우유 업체가 아무리 바나나는 원래 하얗다고 강변해도 사람들에게 바나나 우유는 노래야 제맛이다. 마찬가지로 실제 빛깔에 관계없이 빨간 소세지는 빨간 소세지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새빨간 포장은 아마도 정육점에서 붉은 실내등을 켰던 것과 비슷한 목적 때문에 사용했던 것 같다. 붉은 색 필름이 생고기의 핏빛을 떠오르게 하는 연상효과가 있었을까. 못 먹고 못 입던 시절에 음식의 정체성이 ‘고기’임을 강조하고자 애를 썼다. 진주햄의 메인 광고 모델은 신동우 화백이 그린 돼지이기도 했다. 

그리 까다롭지도 영악하지도 않던 당시의 소비자들의 절반 정도는 이 소세지의 눈가리고 아웅하기 전략에 속아넘어갔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소세지를 고기라고 생각했다. 성장기 어린이들이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하기 때문에, 몸살 걸린 이의 영양 보충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빠의 술안주에는 고기가 제맛이기 때문에, 그런데 고기는 비싸기 때문에 빨간 소세지를 구워먹었다. 그 빨간 비닐 안에 쇠고기가 들어있을까 돼지고기가 들어있을까에 대해서 그다지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오리지날 빨간 소세지는 고기보다는 어묵에 가까운 물건이었다. 이 빨간 소세지의 탄생 비화는 1950년대의 일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쟁 후의 일본에서 수산청은 어민들에게 마구로(참치) 잡이를 장려했는데, 당시 일본도 유통 기술이 그다지 발달하지는 못했다. 공급이 들쭉날쭉했는데 특히 어민들 입장에서는 많이 잡혔을 때가 더 문제가 됐다. 값이 폭락하고 신선도가 팔리지 않아 신선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어육을 이용한 소세지다. 생선살을 가열살균하고 돼지기름을 넣어 굳히면서 양념을 더한 것이 바로 최초의 빨간 소세지다. 일본인들이 서양 음식을 좋아하는 취향과 맞아떨어져서 일본에서 대히트를 기록한 것이 바로 1960년이다. 결국 빨간 소세지의 본질은 고기보다는 어묵에 가깝다. (그런데 실물을 못 보고 기록으로 접하는 입장에서는. 그 귀하고 비싼 참치로 빨간 소세지를 만들었다고오오??? 하면서 놀라울 뿐이다.)

우리나라에는 1963년에 “평화상사”라는 회사가 창업되었는데, 처음에는 어묵을 생산하다가, 일본에서 소세지가 생산된지 7년 후인 1967년에 최초의 축산물 가공품을 국내 시판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회사 이름을 “진주햄소세지(주)”로 바꿨다. 천하장사 소세지를 생산하는 그 진주햄 맞다. 그리고 그 진주 소세지는 아직도 똑같이 판매한다. 성분은 연육 35%, 돼지고기(라고 쓰고 돼지기름이라고 읽는다) 25%. 둘을 합치면 대략 60%인데, 나머지 40%는 다 뭐란 말인가. 

빨간 소세지 하면 진주햄이었다. 소년중앙, 보물섬, 소년경향 등 당시 어린이들의 필독서마다 늘 신동우 화백이 그린 돼지와 홍길동이 연날리기 하면서 노는 류의 두 페이지의 진주햄 광고 만화가 삽입되어 있었다. 내용은 결국 “엄마에게 진주햄 소세지 사달라고 하세요” 로 귀결되었다. 어린 마음에도 그다지 엄마에게 소세지 사달라는 마음이 딱히 떠오르지는 않는 광고로 기억한다.



아무튼 이 빨간소세지에서 정육점 불빛처럼 새빨간 껍질을 벗겨내면 분홍 속살이 나왔다. 이 분홍색이 또 좀 야릇하다. 지구상에 이런 분홍빛을 가진 물건은 빛바랜 물탱크 밖에 없다. 좀 더 고기를 흉내내서 선홍색을 입힐 수도 있었을텐데 왜 하필이면 이런 인공적인 분홍색을 택했을까. 일본에서 처음 참치로 만들 때, 붉은 참치살과 흰 돼지기름이 섞여서 자연스럽게 분홍색이 되었을... 리는 없다. 가열살균하면서 색이 한 번 변했을 것이고, 또 오래 보관하는 과정에서 그 색깔이 유지될 리가 없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면, 평소에 붉다가 익히면 거무튀튀하게 변하는 고기와 달리, 소시지는 익혀도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 아무리 익혀도 그 벌건 색깔 그대로인 쏘세지는 그다지 먹음직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익히지도 않았는데 다 익은 고기처럼 거무튀튀하면 이것 또한 식욕을 자극하는 색깔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홍색을 택하지 않았을까.

물론 상상의 나래일 뿐이다. 1970년대의 우리 기업들이 이렇게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과학적으로 상품을 만들었을 것 같지는 않다. 색소 공장에서 때마침 재고로 남아도는 색소가 분홍색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공장장 딸내미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이 분홍색이라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이 분홍색의 속살은 그냥 썰어도 되지만 대개는 어슷하게 썰었다. 넙대대한 소세지에다 파를 다져넣은 계란물을 입히고 후라이판에 부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다. 계란물을 입히지 않고 그냥 굽기도 했다. 대개는 기름을 듬뿍 둘러서 튀기듯이 굽지만, 우리집의 가정식 레시피는 계란을 보들보들하게 굽는 쪽이었다. 

딴 집에 없는 우리집 식 레시피도 하나 있었다. 다진 마늘과 파를 드으으음뿍 넣고 고추장과 버무려서 조린 방식이었다. 몇 번 실패를 반복하며 재현해본 결과, 마늘이 소세지 중량의 1/3은 들어가야 어렸을 때의 그 맛이 나는 것 같다. 우리 집은 “몸에 좋은 음식”을 “직접 만들어 먹는” 것에 대해 평균적인 가정보다 쪼오끔 더 강력한 음식을 가끔씩 만들어내셨는데, 그 중 하나였던 것 같다. 몸에 좋은 마늘과 파를 최대한 많이 먹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맛이 나름 중독성이 있어서, 나중에 자라고 나서 몇 년 동안이나 생각 속에서 맴돌다가, 나름대로 몇 번이나 재현을 시도하게 만들었다. 어렸을 때 맛본 가정식 레시피의 힘이 나름 평생을 가게 되었고, 지금도 마늘과 파를 좋아하니, 나름대로 작전 성공이었던 셈이다. 가정식 레시피라니, 이런 표현을 썼더니 빨간 소세지가 갑자기 소울푸드로 격상한 느낌이다. 

아닌게 아니라 빨간 소세지는 소울푸드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하고 그립고, 언제 먹어도 맛있고 행복한 음식이 소울푸드다. 

빨간 소세지는 김치나 된장찌개와는 조금 다른 포지션에서 소울푸드다. 김치나 된장찌개에는 약간의 억지와 강박관념도 들어있다. 네가 우리 민족이라면 당연히 김치를 먹어야 한다, 네가 한국인이라면 된장찌개를 싫어할 리 없다는 투다. 반만년을 내려온 전통음식이며 민족 정체성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빨간 소세지는 그렇지 않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다. 이 소세지는 족보도 불분명하고, 정체도 불투명하다. (40%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식사를 함께 해 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빨간 소세지를 싫다고 하는 사람은 하나도 못 봤다. 다이어트 하는 아가씨도, 입 짧은 여대생도, 배나온 아저씨도.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이다. 

40%의 비밀. 사실 비밀이라기보다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것이다. 제품 포장지에 보면 다 나와있다. 밀가루, 식품 첨가물과 색소. 썩 몸에 좋을 것 같지는 않은, 음식보다는 화공약품 이름으로 어울리는 것들이 잔뜩 들어있다.  

빨간 소세지를 몸에 좋으라고 먹나 뭐. 영혼의 평안을 위해서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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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별 | 2011/12/18 08:24 | + 불량식품을 위한 변명 | 트랙백 | 덧글(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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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at 2011/12/18 10:59
비공개 덧글입니다.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8 15:56
답글 드렸어요
Commented by rumic71 at 2011/12/18 15:27
당시 진주햄의 광고 라이벌이 크라운 소시지였지요. 이쪽은 길창덕 화백이 광고만화를 그렸더랬습니다.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8 15:57
그러고보니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덧/댓글을 한 번 했었군요. 검색해보니 나오는데...
Commented by at 2011/12/18 16:36
우리집은 분홍 소세지 말고 안쪽에 노란색 치즈 비스무리한 게 있는 빙글빙글 무늬의 소세지를 먹었던 것 같은데. 분홍 소세지의 다음 버젼이었던 걸까요. 분홍 소세지보다는 씹는 감각이 좀더 단단했던 것 같아요. 이것도 뭐 20년 전 기억이네요^^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8 20:50
첨엔 천하장사 소세지 이야기하시나 하다가... 저도 듣고보니 뭔가 그런게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뭐였을까나... 혹시 기억나는 분 계신가요?
Commented by 차원이동자 at 2011/12/18 18:08
그러고보니까 군대에서 먹던 빅챔인가 하는 중간크기(?)의 소세지대신에 저런 마미소시지를 팔았다면 어떨까...싶습니다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8 20:51
빅챔은 런천미트 계열 아니었나요?
Commented by 차원이동자 at 2011/12/19 01:14
음...말씀하신대로 닭과 돼지가 섞인 가공육은 맞습니다만 '군대소세지'하면 떠오르는녀석이기도 하죠.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9 05:30
아... 잘 기억이 안 나네요.

검색해도 안 나오는 걸 보니까 정확한 이름이 빅챔이 아닌가봐요.
Commented by 늄늄시아 at 2011/12/18 20:52
아마 40%는 계란이랑, 착색제, 전분, 식염, MSG, 보존제 등등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기름 안두른 팬에 익히면 쩍쩍 붙는게, 전분의 특성을 가지고 있더라구요.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8 21:31
제발 그만!!! 더 이상 알고 싶지 않아요!!!!
Commented by mono01 at 2011/12/19 05:47
음.. 저는 그 소세지를 좀 싫어합니다.. 무슨맛인지 모르겠어요.. 어머님이 도시락으로 싸주실때는 남길수가 없어 억지로 몇개 먹고 친구들에게 희사했죠..
문제는.. 요즘도 회사 식당 반찬으로 종종 나오는데, 여전히 싫다는거죠..ㅠ.ㅜ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9 06:28
싫어하시는 분 1호 발견했습니다 ㅋㅋㅋㅋ
Commented by 우석양 at 2011/12/19 15:26
저희집은 주로 타원형의 야채가 박혀있는 야채소세지를 사먹었죠.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반찬 사오는 분홍소세지를 사오면 전 퍽퍽한 식감과
색소를 연상시키는 분홍빛에 거부감이 들어 손도 안댔죠;;

그런데 요즘 술집에 가서 추억의 도시락을 시켜서 나오는 분홍소세지는
맛있게 먹고 있습니다...식성은 변하나봐요;;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19 21:09
야채소세지는 가끔 사먹을 때 가격을 보면, 햄이나 비엔나 소세지와 비교해서 딱히 싸지 않은, 그러니까 정통 업그레이드 가격 같아요.
Commented by 개조튀김 at 2011/12/20 13:08
많이 좋아하지는 않는데 싫어하긴 힘들죠. 다른 집 김치 보다는 좋지만 우리집 김치보다는 별로인 그런 중상위권 느낌 ㅋ
Commented by 찬별 at 2011/12/20 16:27
좋은 표현이네요. 좋아한다기보다는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게 정확한 듯...
Commented by 박혜연 at 2011/12/21 11:25
지금 분홍소세지는 오히려 촌스러운반찬으로 간주되지만 부모님세대때만해도 분홍소세지는 아주아주 잘사는 부유층들이나 먹었던 귀한음식이었어요!
Commented by 제라틴 로 at 2012/10/05 08:30
어렸을 때부터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서 공감이 안 되네요;;; 훈제 햄이나 소세지, 스팸 등을 일찍부터 먹어봐서 그런지 어육 소세지 같은 건 입에 안 맞아서;;;; 나중에는 건강 때문에 햄이나 소세지도 기피하게 되었음. 가격도 옛날 같지 않게 비싸져서 사먹기 부담스러워지기도 했고요ㅠㅠ
Commented by 찬별 at 2012/10/04 13:44
이에 안 맞는게... 치감이 별로라는 의미신가요? 것도 재밌네요 ㅋㅋ
Commented by 제라틴 로 at 2012/10/05 08:30
입에 안 맞는다는 말을 잘못해서 이에 안 맞는다고 했네요^^ㅎㅎㅎㅎㅎ
Commented by 방울방울 at 2014/10/29 20:29
일본의 김밥이 생선살 소보로를 넣은 반면 한국은 이 유사 소시지가 대체하게 되었지요. 1970년대엔 이 소시지도 중산층 이상의 자녀만 먹는 음식이었어요. 미국식 돈육 소시지가 없던 시절이니까
Commented by 이피 at 2015/06/29 21:15
분홍색은 기존 서양 소세지를 본딴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이탤리 소세지 모르타델라(Mortadela)가 가장 유력한 모델로 추측되는데, 색상도 분홍색이고 맛과 식감도 유사한 데가 있는 듯. 아니면 리옹 소세지(프랑스 소세지일까요? 독일에서는 Lyoner로 시판됨). 분홍색 소세지가 의외로 유럽에도 꽤 있더군요.
Commented by 찬별 at 2015/06/30 23:00
재밌는 제보 감사드립니다.
Commented by 하나 at 2018/01/11 23:57
어쩐지 물에 데쳐 먹으면 어묵탕 맛이 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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