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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 회고록 - 1889, 워싱턴 + 서재필 회고록 [팩션]



#1889년, 워싱턴
나는 해리 힐맨 아카데미를 최우수로 졸업하고, 학생 대표로서 졸업 연설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하류 인생을 경험했던 나로서는 최우수 졸업의 자격을 가지게 된 것이 과거에 급제했을 때보다도 더 기뻤다.
졸업식을 마친 날, 후원자인 홀렌벡의 호출을 받았다. 그는 내 학비 전액을 후원해주었고 가끔씩 얼굴을 마주치기도 했었지만, 인사 이상의 대화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홀렌벡은 냉정한 사람이었고, 나로서는 접근하기 어려운 상대였다. 그래도 최우수 졸업 시상을 받은 날 호출을 받았으니 축하와 덕담을 해줄 것을 기대하며 이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그가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자네, 라파예트 대학의 법학과에서 입학 허가를 받았더군.”
홀렌벡은 해리 힐맨의 이사장일 뿐만 아니라 라파예트 대학에서도 중요한 후원자로서 이사 직위에 있었다. 내가 라파예트 대학을 택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그런데 뭐가 잘못 된 것일까. 왜 저렇게 못마땅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불안을 감추며 대답했다.
“네, 법조계에 종사하신 깁슨 선생의 말씀을 많이 듣다보니 앞으로 저도 정치나 법조에 종사하면서 사회 정의를 높이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나는 자네가 신학을 공부하고, 조선으로 돌아가서 선교사가 되겠다고 약속한 줄 알았는데. 그것이 내가 자네를 후원한 조건이기도 하고.”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결코 그런 약속을 했던 기억이 없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약해진 마음을 교회에 의지를 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헛소리를 하고 기억을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지는 않았다. 나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했으나 홀렌벡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신학을 공부하고, 자네의 고국으로 돌아가서 선교사가 되어주게. 그렇다면 앞으로도 자네를 후원하겠네. 대학원까지의 학비와 생활비로 한 달에 오십 달러를 지원하겠네.”
홀렌벡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선교사가 되겠다고 종이에 쓰고, 서명을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빈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원래도 돈 문제에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어려서부터 선비로서의 청렴결백보다는 현실적인 생존을 고민해야 할 상황이 더 많았기도 했다. 하지만 특히 지난 사 년간의 미국 생활은 내 몸과 마음에 돈의 중요성을 뼈에 저리도록 새겼다.
돌이켜보면 샌프란시스코의 골방에서 정신적 파탄 지경에 몰렸던 것은 단지 죄책감이나 외로움 뿐은 아니었다. 최하층민과 어울려 살아야 했던, 좋은 음식 한 끼도 마음놓고 먹을 수 없었던 물질적 가난에서 시작된 자괴감은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지난 삼년간 해리 힐맨 아카데미를 다니면서도, 언젠가 다시 빈민의 구렁텅이로 굴러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오십 달러라니. 샌프란시스코에서 하루 다섯 시간만 자면서 하루 종일 몸이 부서지도록 노동을 해야 받을 수 있던 액수다. 그 돈이 있다면 나는 현실로부터 온전히 한 발짝 벗어나서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질 수가 있다.
하지만 선교사라니. 그것은 현실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을 위해 봉사하는 삶 아닌가. 내가 과연 봉사하는 삶에 어울리는 인물인가. 나는 도쿄에서 만났던 아펜젤러 목사, 언더우드 목사의 선량하고 맑은 눈빛을 떠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홀렌벡 선생님의 은혜는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아니었다면 저는 아직도 샌프란시스코의 잡역부로 삶을 허비하고 있을 것이고, 미국 사회의 리더로서 성장하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평생 받들고자 하는 제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홀렌벡의 시선은 조금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그는 냉정한 사업가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몇 번 축인 후 말을 이었다.
“하지만 저는 조선에서 아직도 거액의 현상수배범이며 반역자입니다. 조선에 돌아가면 선교를 하기 전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할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아직 저의 미래의 직업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오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을 졸업하게 될 육칠년 후의 미래를 상상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육년 전에 조선의 고위 공직자였던 시절에, 육년 후에 미국 시민이 될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제기랄. 말이 길어진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들로 홀렌벡을 설득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홀렌벡은 여전히 차가운 눈빛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고 선교사가 되는 서약을 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고, 예 아니오의 대답 이외에는 받아들이지 않을 표정이었다.
결국 나는 고개를 저으며, 아니오를 택했다. 홀렌벡이 말했다.
“그래, 자네와 내 생각이 달랐군. 우리 인연은 여기까지인 것 같다. 지금까지의 재정 지원에 대해서 후회를 하지는 않지만, 앞으로 자네에게 더 장학금을 줄 수는 없다. 부디 건승하기를.”
나는 떨리는 손으로 홀렌벡과 악수를 하고 나왔다.
학비와 생활비 지원이 끊긴 상황에서 여러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지난 몇 년간 미국 사회에 적응했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있으니, 샌프란시스코에서처럼 밑바닥의 일자리를 가지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장으로 예전보다 조금 좋은 일자리를 찾는 것에 만족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미국 사회에 정착하고 싶다. 미국에서도 성공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학비만 조달할 수 있다면 말이다.
우선 입학 허가를 받은 라파예트 대학으로 찾아갔다. 신입생 담당 상담교사인 에드워드 하트는 내 상황을 호의적으로 경청했으나 뾰족한 해법을 주지는 못했다. 그는 홀렌벡이 후원하는 학생들 중에는 몇 해에 한 번씩 나와 같은 사례가 생긴다며, 홀렌벡의 자선 사업은 자기 만족일 뿐이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홀렌벡은 라파예트 대학교 이사회의 영향력 있는 일원이고, 중요한 후원자이기도 합니다. 내가 제이손 학생을 장학금 후보자로 상신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이사회에서 홀렌벡이 제동을 걸 겁니다. 장담하건데 라파예트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나는 며칠 간 라파예트 대학이나 인근의 필라델피아를 돌아다니며 일자리를 알아보았다.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을 뿐 아니라 급여도 높지 않았다. 그 돈으로는 학교를 다닐 수 없었다. 대학교의 학비는 주경야독으로 충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것은 라파예트 대학 뿐 아니었다. 어디든 대학의 학비는 펄쩍 뛸 만큼 비쌌다. 한 해를 입에 풀칠도 하지 않고 열심히 모아도 한 해의 등록금을 낼 수 있을지 모를 정도였다.
결국 나는 어깨를 늘어뜨리고 윌크스베어로 돌아갔다. 윌크스베어도 이제 마지막이다. 해리 힐맨을 졸업했으니 교장 선생 댁에서의 하숙 생활도 끝난 것이다. 그들이 쫓아낼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남아있을 면목이 없었다.
내 사정을 눈치챈 깁슨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학비 문제로 명문 사립대에서 전일제로 공부할 수 없다면, 일을 하면서 반일제로 공립 대학교에 다녀도 되지 않겠나? 공부를 하면서 다닐만한 직장도 있을 거라네. 내가 추천서를 써줄테니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협회를 한 번 가보게. 워싱턴에는 내가 아는 다른 사람들도 좀 있으니 도움이 될 걸세.”
나로서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물론 법조계에서 오래 일했던 깁슨의 추천서는 지푸라기보다 훨씬 더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짐을 쌌다. 해리 힐맨에서의 지난 삼 년은 조선의 천둥벌거숭이였던 나를 교양을 갖춘 미국 시민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줬다. 고마운 시간이었고,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내 양육자나 다름없던 노신사 깁슨과 뜨거운 악수를 나누고, 또 스코트 교장과도 서로 행운을 빌어주며 이별을 했다. 그리고 윌크스베어를 떠나 워싱턴으로 갔다.
*
워싱턴은 미 합중국의 수도였으나 필라델피아나 샌프란시스코처럼 번성한 대도시가 아니었다. 도시 규모는 거대하지 않지만, 대신에 엄숙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행인이든 건물이든 격식을 갖추고 있는 느낌이었고, 괜히 스스로도 몸가짐을 돌아보게 만드는 그런 곳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왕궁에 처음 입궐할 때에 느꼈던 위압감과 무게감이라고 할까.
스미소니언 협회는 미국의 다락방이라고 불리우는 기관이다. 이 기관은 자연사박물관, 미국사 박물관, 아시아태평양 박물관 등 가지각색의 박물관을 운영하는 주체로서, 아시아의 유물도 많이 소장하고 있기 때문에 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정통한 내게 적합한 일자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담당자인 오티스 교수는 추천서를 읽더니 내게 일부 유물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업무를 맡겼다. 한 달 기한의 시간제 일자리였다.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했기 때문에 단기 계약직은 실망스러웠지만 아무튼 최선을 다했다.
한 달의 계약이 끝나자 오티스는 나를 육군 의무부대 연구소 산하 의학도서관으로 소개해줬다. 그 곳의 책임자인 빌링스는 중국과 일본 등지에서 수집해온 수천 권의 의학 서적과 잡지를 분석하고 연구해야 하는데, 언어를 아는 사람이 없어 도서 목록조차 만들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는 육군의 아시아 관련 업무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며, 나를 정직원으로 채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특별 채용 절차는 조금 복잡했다. 그들은 내 중국어나 일본어 실력의 검증이 필요했지만 나를 평가할 능력은 없었기 때문에, 중국과 일본 대사관에서 나를 위한 시험 문제를 출제하고 평가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중국 대사관의 번역 문제는 누가복음 15장이었고, 일본 대사관의 문제는 요한복음 15장이었다. 나는 번역을 했다기보다 거의 원문 그대로를 암기해서 다시 써내려갔다. 어쩐지 주님의 가호가 나를 따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당연하게도 나는 완벽한 점수로 합격했다.
이로써 나는 미국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다. 고용이 보장되었고, 특수 직무로 분류되어 급여도 일반 공무원보다 높았다. 내가 받는 급여는 매월 일백 달러에 가까웠다. 일백 달러! 샌프란시스코의 노무자 시절에 비해 세 배에 가까운 돈을 안정적으로 받게 된 것이다!
*
방대한 양의 도서의 목록을 작성하고 분류하는 작업은 손이 많이 갔고 시간도 많이 필요했지만, 특별히 어렵거나 힘들지는 않았다. 나는 직업을 얻는 것과 동시에 공무원을 위한 야간 대학 입학을 준비했다.
추천서를 받는 과정에서 빌링스는 내가 택한 전공을 의아해했다.
“법학을 선택했더군. 왜 하필 법학인가? ”
해리 힐맨의 졸업식장에서 홀렌벡이 나를 보던 차가운 눈길이 기억났다. 그 날 홀렌벡의 결정 때문에 내 진학과 직장 등의 진로가 크게 바뀌었다. 빌링스가 그 때의 홀렌벡처럼 내 미래를 결정하지는 않을까? 아니다. 빌링스는 내 진학에 왈가왈부할 권한은 없다. 나는 소신있게 대답했다.
“사회에서 가치있는 변화를 일으키고 싶기 때문입니다. 법학이나 언론학을 전공하면 영향력 있는 직업을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그 일은 지금 자네가 하는 사서 업무와도 거리가 있고, 또 자네의 장래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문학이나 도서관학을 전공하라는 말일까? 나는 법학과 언론학의 사회적 필요성을 강변했고, 빌링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른 학문을 권했다. 대화가 공회전하자 빌링스가 마침내 헛기침을 하더니 정색을 하며 말했다.
“이보게, 필립. 내가 조금만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네. 자네는 조선의 고위 공직자였으니 다시 그 경력을 살리고 싶겠지. 자네의 학위를 조선에서 활용한다면 법학이나 언론학이 최선일 수도 있다. 하지만 미국에 정착한다면... 그런 전공이 큰 도움을 주지 못할거라네.”
전혀 몰랐던 사실은 아니었지만 여태까지 깨닫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는 불행하고 우울한 조선의 기억을 모두 기억의 심연 깊숙하게 파묻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내 무의식 어딘가에서는 아직도 한 나라를 뒤흔드는 정치 지도자를 꿈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굴을 붉히면서 억지를 부렸다.
“저는 정당한 시민권과 투표권을 가진 미국 시민으로서, 그리고 정열이 넘치는 청년으로서, 미국을 보다 정의롭고 활기찬 사회로 만들기 위해 어떤 일이든 할 생각입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는 겁니까? ”
빌링스는 대답을 하지 않았고, 나는 잠시 후 흥분을 가라앉혔다.
“현실적인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조금 더 조언을 해주시지요. 차분히 듣기로 약속드립니다.”
그러자 빌링스가 말했다.
“전공 선택은 자네의 자유다. 학위를 받은 후 공무원으로서 승진을 해도 좋지만, 학비를 들인 만큼 더 좋은 직업을 찾고 싶겠지. 그런데 법조계나 언론계의 직장들은 인종적 다양성에 대해 보수적이라네. 사회를 움직이고 사람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은 백인의 몫이라고 생각하지. 백인이 아닌 법관에게 판결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네. 내 말 이해하나? 반면 그런 차별을 겪지 않아도 되는 분야도 많다. 공학이나 기술, 의학... ”
그의 말이 옳다. 흑인이 노예로부터 자유민으로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사회 저변에서 흑인은 하인으로 취급받는다. 심지어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중국인 배척법 같은 노골적인 황인종 차별법이 존재한다. 그 법률은 정부가 제정했다기보다 주류 인종들의 사회적 합의에 의해 제정된 것에 가깝다. 내가 나서서 변화시킬 수 있는 흐름이 아니다.
빌링스는 그 중에도 의학을 권했다.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직업이지. 그리고 현재의 직업 내에서 경력을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다네. 미군 군의참모부는 나쁜 직장이 아니라네. 이 곳의 도서관과 실험실을 모두 쓸 수 있는 장점도 있어. 만약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여전히 좋은 직업을 얻을 기회가 충분하지. 개업을 하고 개인 의사가 될 수도 있을 걸세.”
나는 빌링스의 조언을 하루 종일 곱씹고 고민했다. 결국 빌링스의 조언에 따라 대학 전공은 의학과를 택했다. 돈을 더 많이 벌려면 전기공학이나 농학을 택하는 것이 나았겠지만, 사회적으로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을 아주 버릴 수는 없었다. 의사는 어떤 중요한 사람이든 한 사람의 의사와 환자로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현 직장과의 관련성 때문에 입학 사정이 유리하고 장학금을 받을 지도 모른다.
나는 코코란 대학 야간반의 학부 과정에서 의학과 수학을 위한 기초 교양학문을 수학했다. 공무원들이 대학교 전공과목 수강 전에 교양과목을 공부하기 위해 주로 등록하는 야간 대학이었다. 내가 듣는 과목은 주로 수학, 물리학, 화학 등이었다.
윌크스베어를 떠난지 약 반 년만에 다시 일상의 구도가 잡혔다. 낮에는 육군 도서관에서 낯선 동양 의학 서적을 조사하여 서지를 만들고, 저녁에는 코코란 대학에서 공부를 했다.
다음 해에는 컬럼비안 대학교 의학과로 진학을 했다. 컬럼비안 대학교는 후일 조지워싱턴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는 지역 명문 대학 중 하나였다. 의학은 학습량이 워낙 많아서 주말에는 하루 종일 학교 도서관에 붙어서 살아야 했다. 여가 생활이라고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교회에 가서도 꾸벅꾸벅 졸기 일쑤였다.
조선과는 거의 연락을 끊고 살았다. 기껏해야 서광범이나 윤치호와 가끔 편지를 주고 받는 정도였는데, 그들도 모두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선 소식은 거의 들을 일이 없었다.
어느 날에는 의외로 워싱턴 포스트를 통해 조선 소식을 들었다. 신문에는 조선이 일확천금의 땅이니 금광 사업을 위해 건너오라는 류의 광고가 종종 게재되었다. 최근에는 민영익을 살려냈다던 의사 호레이스 알렌이 조선에 투자할 광산업자를 모집하는 행사를 개최한다는 신문 광고를 실었다. 그 광고의 뒷면에는 조선이 얼마나 미개한 땅인지 성토하는 기사가 게재되었다. 최근 조선에서는 서양인 선교사가 조선인 아기들의 눈알을 빼서 사진기 필름 재료로 쓴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선교사들이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서양인 동료들이 내게 몰려와서 물었다. 정말로 황금이 많이 있냐, 왜 아이의 눈알로 필름을 만든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질문이었다. 나는 조선에 대한 신문 기사가 부끄러웠고, 조선과 나 사이에 연결고리가 있어 사람들이 아는 척 하는 것이 싫었다. 나는 최소한의 대답만 하며 가급적 그들을 피했다.
서광범과 윤치호는 내가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던 시절에는 자주 서신을 교환했으나, 최근에는 그들도 각자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각자의 일로 바빠 교류가 뜸해졌다. 나는 윌크스베어를 떠나고 워싱턴에서 자리를 잡은 지 반년 쯤 지나서 두 사람에게 편지를 보냈고, 얼마 후 답장이 왔다.
겉봉에는 케네쓰 서라고 되어 있었다. 낯선 이름이었지만 누군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내게 편지를 보낼 서씨는 서광범 밖에 없다.
편지에 그는 언더우드의 후원으로 입학했던 럿거스 주립대학 생활을 그만뒀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시민권 취득한 것을 축하하며, 자신도 시민권을 신청했으니 조만간 취득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었다.
서광범은 예전에 내가 영어 이름을 필립 제이손으로 정했을 때 나를 가볍게 책망했다. 가문의 어른으로서 서씨라는 성을 버린 것에 대해 13촌 조카를 나무란 것이다. 케네쓰 서... 그는 미국식으로 개명했지만 서씨라는 성을 남겼다. 그는 아직 자신의 정체성을 조선에 두고 있었다.
그의 편지에는 조선에 대한 염려와 언젠가의 권토중래의 꿈이 담겨 있었다. 그는 다시 조선으로 돌아가서 백성들의 미몽을 일깨워가며 어둠의 조선에 문명을 선물하기를 꿈꾸고 있었다.
나는 그런 편지를 읽는 것이 끔찍했다. 서광범이 있는 뉴저지는 마음만 먹으면 짧은 휴가를 내고 다녀올 수 있는 가까운 거리였다. 우리는 만나자는 서신은 서로 교환했지만 솔직히 서광범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조선과 인연을 끊겠다고, 어둡고 무거운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지겠다고 결심한 입장에서, 권토중래의 꿈을 가진 옛 혁명 동지와 만나는 것은 불편하고 두려웠다.
시민권 신청을 했다고? 그렇다면 서광범도 선서를 하겠지. 조선에 대한 충성을 자발적으로 그리고 완전히 폐기한다는 내용을 스스로의 입으로 말해야겠지. 서광범이 과연 그렇게 할까? 그런 후에는 조선에 대한 권토중래의 꿈은 버리게 될까? 그 때가 되면 다시 서광범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윤치호에게서도 답장이 왔다. 윤치호는 요코하마에서 헤어진 후 상하이로 건너갔었다. 내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낮에는 최하층민과 섞여 막노동을 하고 밤이면 가족이 죽는 악몽을 꾸면서 짓이겨질 때, 윤치호는 상하이에서 술과 아편과 유곽의 여인들 속을 헤매면서 좌절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비슷한 시기에 영혼을 소모하며 울분을 피처럼 토했다. 차이가 있다면 주머니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공감대가 있었다.
내가 해리 힐맨에 입학할 무렵 윤치호도 조금은 정신을 차리고 미국으로 유학을 왔다. 그가 온 곳은 남부의 테네시 지역이었다. 미국을 기회의 땅, 약속의 땅으로 느끼는 나와는 달리, 윤치호는 미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인종 차별 문제로 치를 떨었다. 윤치호가 편지로 보내는 남부의 인종차별 문제는 샌프란시스코의 중국인 배척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지독했다.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녀본 윤치호는 그 중 일본을 좋아했다. 언젠가 편지에 이런 글을 쓴 적도 있었다. ‘인종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가득찬 미국이 싫소. 더럽고 냄새나는 중국도 싫소. 악귀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도 싫소. 한 나라를 고르라면 나는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일본에서 살고 싶소! ’
이번에 보낸 편지에 대해 윤치호가 보낸 답신에는 그의 근황을 자세히 전하고 있었다. 현재 다니고 있는 밴더빌트 대학의 학부 준비 과정이 곧 끝나는데, 장학금 사정, 전공 과목, 주변의 인간관계 등이 복잡하게 얽혀 이후의 진로를 고민한다는 것이었다. 편지로 봐서는 그렇게 복잡한 상황 같지 않았다. 사소한 문제도 깊이 생각하는 윤치호의 꼼꼼함 때문에 선택이 힘든 것 같았다. 그는 조지아주의 옥스퍼드 대학이나 에모리 대학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지만, 차라리 워싱턴으로 상경해서 나와 함께 직장을 다니는 생각도 한다는 것이었다.
나를 만난다고? 나는 윤치호를 만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박영효, 서광범과 헤어진 후 조선 사람을 만나지 못했으니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만약 정말로 간절히 보고싶었다면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서 만났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치호를 만났을 때 그는 내게 죽어간 동지와 처자식들에 대해 이야기해줬었다. 윤치호의 얼굴을 보면 그때의 고통이 다시 떠오를 것 같았다.
나는 윤치호를 만날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조선에 대한 것을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그 병적으로 참혹한 절망에 빠졌던 기억은 머릿속에 묻어놓으면 삭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몇 년이 흐르자 오히려 더욱 어둡고 무겁게 뭉쳤다. 조선을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고 조선을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윤치호와 서광범조차 만나기 싫으니, 조선의 다른 그 누구인들 만나고 싶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운명은 내게 다시 조선을 연결시켰다. 나는 전혀 의외의 장소에서 조선인 한 사람을 만났다. 어느 주말에 신발을 사러 시장을 들렀는데, 잡화를 팔던 동양인이 중국어로 말을 걸었다. 나는 영어로 중국인이 아니라고 대답하고 돌아서는데, 그 자가 조선말로 말했다.
“긴가민가 했습니다. 그럼 조선에서 오신 것이 맞군요. 언제 오셨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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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호레이스 알렌. 그는 처음에 의료선교사로 입국했으나, 입국 후 3년 후인 1886년에는 주미 공사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일기를 읽은 내 느낌은, 처음부터 신앙인이라기에는 너무 세속적인 사람 아니었나 생각한다. 아무튼 알렌이 박정양, 이완용 등을 휘몰고 주미 조선공사관을 세우기 위해 방문한 것이 1888년이다. 그의 목적은 주미 조선공사관을 세우는 것을 돕는 것도 있지만, 조선의 금광에 대한 투자자 유치 등을 위해서도 노력했던 것 같다. 

http://coldstar.egloos.com/5361717

2. 서재필이 당시에 일자리를 찾으러 다니던 것이 꽤 절박했던 모양이다. 대통령한테 (일자리 구해달라고) 면담 갔다는 이야기도 본 것 같고. 그의 특수직 공무원 봉급이 100 달러였다는 것도 내 생각은 아니고 어디선가 본 것인데, 믿어야할지 말아야할지 나도 모르는 숫자다. -_- 




덧글

  • 불별 2015/08/14 17:09 # 답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__ )
  • 찬별 2015/08/15 03:53 #

    별 말씀을... (" )
  • 암호 2015/08/15 01:06 # 답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고보니, 서로 연결이 되는군요. 저 알렌 통역으로 급부상한 이하영이 죽었을 때 윤치호가 얼마나 씹던지.... 저 알렌도 한반도 방역사에서 주도적 위치인 애비슨과 연결되죠. 그 애비슨과 연결되는 것이 유한양행.. 유일한 회장이 한반도로 간다고 하니, 재혼으로 얻은.... 그러니까 집안어른이 링컨 전임이기도 한 조각가로 활동하는 둘째딸이 만든 버드나무 조각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서재필 밑에서 활동한 비서라는 분이 한 자기가 했다는 식의 주징이지만 유일한 회장과 관계 있는 안익태의 창씨개명에 한소리했다던데, 신문에서 광고 때리는 것에서 저절로 생각나네요.
  • 찬별 2015/08/15 04:22 #

    당시대의 개화인물 커뮤니티는 정말 작았던 것 같습니다. 유명하다 싶은 인사들은 아무튼 서로서로 친구거나 동료거나 적수이거나...
  • ㅇㅅㅇ 2015/08/16 01:55 # 삭제 답글

    찬별님 항상 잘 보고 있어요!
  • 찬별 2015/08/16 15:55 #

    감사감사합니다 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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