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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 칙릿소설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 마지막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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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커먼 여인숙에서 뛰어나온 사내의 그림자에, 여인숙이 완전히 가려버렸다. 튀어나온 사내는 키가 이미터는 될 정도로 크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했다. 굴속에서 곰이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고, 알라딘의 램프에서 거인이 튀어나온 것 같기도 했다.


김나나와 이종민은 순간적으로 말을 잊었다.


“우리 엄마보고 병신이라고 한 놈 누구냐니까--안! ”


사내가 다시 고함을 질렀다. 김나나와 이종민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딴전을 피웠다. 아마도 만만해보이는 사람이 이렇게 시비를 걸었다면 싸움이 붙었을 지도 모르겠는데, 구덩이에서 기어나온 곰과는 시비를 붙는 것보다 술을 깨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모양. 아무튼 다리를 저는 중년 여인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아섰다.


“너야-? 너지-이이! ”


그런데 목소리가 크고 우렁차기는 한데, 자세히 들어보면 전혀 위협적이지가 않았다. 말투가 혀 짧은 소리인데다가, 말 속에 살기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시골 마을에 풀어 기르는 보신탕용 황구들이 짖는 소리는 우렁차지만 자갈 하나 던지는 시늉만 해도 십리 바깥으로 도망치는 것처럼 말이다.


김나나는 목소리가 낯익은 것을 깨닫고 한참 상대를 쳐다봤다.


“만수 아니니? ”


덩치 큰 사내가 움찔하더니 김나나를 쳐다보았다.


“그래 나 강만수다아- 어쩔래! ”


“너 어디 가버렸나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


“강만수는 사라지지 않는다니까아-!! ”


“나 김나나야.”


“어? 어? 김나나? 김나나? 어 김나나다! 김나나다! ”


강만수는 김나나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벌집을 찾아낸 곰돌이처럼 팔짝팔짝 뛰었다. 다리를 저는 그의 노모가 강만수의 몸부림을 막아내지 못하고 뒤로 비실비실 물러났다. 김나나가 재빠르게 강만수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저 남자 좀 때려서 쫓아내줘. 나 자꾸 괴롭혀.”


이종민이 깜짝 놀랐다. 김나나, 저 여자, 저딴 식으로 나오다니. 그런데 두 사람이 서로 아는 사이였단 말이야? 도대체 어떤 사이지? 오빠 동생? 옛날 애인? 친구? 아무튼 이종민은 김나나의 한 마디에 술이 완전히 깨고, 이어서 기침을 하면서 목청을 가다듬었다.


“너! 왜 우리 나나 자꾸 괴롭혀어어! ”


이종민은 두 손을 들어올리고 손바닥을 쫙 펴서 흔들어보였다. 영화에서나 보던 그 포즈였다.


“미스커뮤니케이션입니다. 괴롭힌 것이 아니고, 나나양이 술에 조금 취해서, 제가 데려다 주려고 하던 중에 조금 실랑이가 있었지만...”


“왜! 나나! 괴롭히냐고오오오오오! ”


강만수가 이종민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양복 여기저기서 우지직 우지직 소리가 나면서 옷감이 뜯어지고, 이종민은 허공으로 사오 센티미터 들려올라갔다.


“이, 이러지 마십시오. 법적으로 해결하면...”


이종민이 뭔가를 말하려고 손을 내저어가며 더듬거렸다. 그러자 강만수가 이종민의 멱살을 바싹 끌어당기고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며 소리를 질렀다.


“나나 괴롭히지 말라구! ”


“넹! ”


강만수는 이종민을 확 뒤로 밀쳤다. 이종민이 바닥에 제대로 서지 못하고 비틀비틀 하다가 털썩 주저앉았다.


강만수는 환하게 웃으며 김나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나야! 나나야아아! 나 잘했지? ”


강만수가 김나나에게 와락 안기자, 김나나는 하마터면 뒤로 쓰러질 뻔 했다. 강만수는 얼굴을 비벼대며 김나나에게 달려들었다. 체중 백킬로그램이 넘는 강만수를 술에 취할만큼 취한 김나나가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김나나는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나나야, 나나야 나 좋아 룰루루룰루룰”


넘어지면서 엉덩이에 돌이 찍혔는데, 그 위로 강만수가 짓눌러대자 김나나는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꺄아아앙ㄱ-! ”


김나나가 크게 비명을 지르자 골목 바깥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뭐야! 무슨 일이야! ”


몰려오던 사람들은 거구의 강만수를 보고 움찔 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 너 강만수 아니냐? ”


“어, 박진희다. 박진희다.”


“이 자식아, 박진희다가 뭐야, 진희 누나다라고 해야지.”


“박진희 누나다. 어헝헝헝.”


몰려온 것은 다름아닌, 삼겹살 집에서 기나긴 일차를 마치고 맥주집으로 이동하던 중이던 회식 팀이었던 것이다. 박진희가 가서 강만수를 떼어놓고는, 바닥에 자빠져있는 것이 다름아닌 김나나인 것을 알아보고는 수선을 피웠다. 한편 누군가가 다른 구석에 쓰러진 이종민의 얼굴을 알아봤다.


“어이구, 이거 같이 오셨던 컨설턴트님 아니십니까.”


이종민이 뒷통수를 긁으면서 일어났다. 상황이 이렇게 우습게 전개되리라고는 정말 상상도 못 했는데. 내가 지금 어쩌다가 이러고 있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기어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게다가 앞뒤 사연이 다 밝혀지면 개망신을 당할텐데.


그 때 김나나가 눈물콧물을 짜면서 떠들기 시작했다.


“엉엉엉. 제가 술이 좀 취해서 일찍 나왔거든요. 그랬고 저기 컨설턴트님이 마침 집에 가는 방향이 같아서 바래다주겠다고... 그래서 가는 길에 갑자기 골목에서 쟤, 강만수가 뛰어나와서 저를 이쪽으로 끌고....”


이종민이 앞뒤를 알아차렸다. 김나나로서도 앞뒤 이야기를 다 까발려서 좋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술 마시자고 단 둘이 빠졌다는 둥, 모텔에는 죽어도 못 가겠다는 둥, 그런 이야기가 나오면 말이다.


이종민은 점잖게 입을 열었다.


“저기 있는 덩치 큰 친구가 갑자기 덤벼드는 바람에 조금 실랑이는 있었지만 별 큰 일은 없었습니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하하.”


하지만 김나나는 너무 조용히 넘어가기가 아쉬운 듯이 악다구니를 썼다.


“별 큰 일이 없기는 뭐가 없어요. 저 바보같은 놈이 갑자기 덤벼드는 바람에 나 지금 허리 다치고 다리 삐고... 아우 내가 정말 못 살아! ”


이종민이 김나나를 말리면서 부축하는 시늉을 했다. 김나나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도 이종민과 손이 닿을 때 무언의 의사소통을 했다. 공범자들이 나누는 음모라고나 할까.


강만수는 여러 사람의 눈길이 자신에게 집중되었음을 알고, 그리고 이유는 잘 모르지만 갑자기 김나나가 자신에게 노골적으로 화를 내고 있음을 알고, 겁먹은 짐승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여러 사람들이 강만수를 향해 끌끌 혀를 찼다.


겁 먹은 강만수를 두고 모두들 조용히 퇴장하려는 찰나, 갑자기 여인숙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까 언제였는지 안으로 사라졌던, 강만수의 다리를 저는 어머니가 나온 것이었다.


중년 여인은 두 손으로 대야 가득 더러운 물을 담고 있었다. 생선 뼈다귀, 김치, 비닐봉지 등이 둥둥 떠다니는 더러운 물이었다. 노모는 그 대야를 힘껏 이종민과 김나나를 향해 뿌렸다.


“꺄악-! ”


“뭐야 이거-! ”


이종민과 김나나가 비명을 질렀다. 중년여인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너희들, 당장 꺼져. 우리 강만수는 내가 지킨다.”


김나나가 소리를 질렀다.


“아줌마는 또 뭐야! ”


중년 여인이 대답했다.


“내 이름은 이명방이야! ”



정통 칙릿소설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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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별 | 2009/03/16 18:32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10)

본격 칙릿소설 -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12

 


이종민은 두 병의 맥주를, 김나나는 두 잔의 칵테일을 더 마셨다.


처음에 이종민은 썰 풀기 시작한 길에 노블리스 오블리쥬에 대한 이야기를 이십 분 정도 떠들었다. 자신이 얼마나 유복하게 자라났으며 돈이 많은지, 그러나 사실 돈은 많아봐야 쓸모가 없으며, 가난한 사람에 대한 똘레랑스야말로 진정 배워야 하는 그 무엇, 북한 어린이들이 굶고 있는데 어떻게 삼만원짜리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냐는 류의 이야기였다.


김나나는 처음에는 들어주는 척이라도 했으나 잠시 후 지겨워졌다. 이종민은 화제 선정이 부적절한 것을 깨닫고, 그 때부터 휴고 보스 양복의 라인, 제냐나 기타 브랜드와 비교했을 때의 장점, 매장별 특징 같은 이야기를 떠들기 시작했다. 사실 이종민도 잘 몰랐지만, 첫 양복을 살 때 나름 신경을 썼던 탓에 그럭저럭 아는 척은 할 수 있었다. 역시나 김나나의 눈에서 총기가 돈다.


그들은 편안한 분위기에서 한 시간 반 정도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사이에 그들의 대화는 훨씬 친밀해져 있었다. 이종민은 초반 삼십분으로 컨설턴트로서의 후까시를 충분히 주었다고 판단하고,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술을 더 마셨기 때문인지, 김나나도 별반 반항이 없었다.


이종민은 조금 과감하게 진도를 빼기로 했다. 김나나의 손에 소금을 얹고, 데낄라를 마신 뒤 손등에 얹은 소금을 핥아먹는 것이다. 멕시코의 3D 업종 종사자들이 주로 하는 행동이었지만, 그것도 물건너온 풍습이다. 만약 따귀라도 한 대 맞게 된다면, 정색을 하고서 “죄송합니다, 제가 아이비리그에서 유학 시절에 몸에 배였던 나쁜 버릇이 아직 남아있어서요.” 같은 말로 얼버무리면 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나 김나나는 싫어하지 않았다. 손등을 통째로 쪽 빨아먹는 순간, 김나나는 깔깔거리며 좋아했다. 김나나의 까르르 하는 웃음소리가 묘하게 이종민을 자극했다. 원래 한 번으로 끝내려고 했던 짓인데, 이종민은 몇 차례를 더 하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또 핥으려면 술을 한 잔 더 먹어야겠지? 이종민은 데킬라를 더 시키고, 소금을 뿌리는 위치를 살짝 바꿨다. 손등에 이어서 두 번째는 팔등. 세번째는 입술. 네 번째는 목덜미.


술 네 잔에 그들의 진도가 벌써 목덜미까지 나갔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 빤스 속에도 소금을 뿌리고 싶었지만... 그걸 참을 정도의 의식은 가까스로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바깥으로 나왔다. 열시다. 착한 어린이들은 이미 한시간 전에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은 못된 어린이, 그리고 일부 몰지각한 어른들이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남녀가 만나 목덜미까지 쪽쪽 빨았는데, 설마 집에 가자고 헤어지기도 이상하지 않은가. 이종민은 자연스럽게 김나나를 모텔 골목 쪽으로 이끌었다. 하지만 김나나는 모텔 간판들을 보더니 고집센 당나귀처럼 걸음을 멈췄다.


모텔이라니. 설마 저길 가자고?


굶주리는 북녘 동포와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을 위해서 프렌치 레스토랑은 양보했다. 하지만 모텔은 못 간다. 그래도 오늘 내가 같이 술먹고 있는게 아이비리그 나왔다는 컨설턴트 아닌가. 솔직히 나이트클럽 가서 놀고 먹는 양아치만 잘 붙잡아도 가는 곳이 호텔이다. 해도해도 정도껏 해야지. 오만원짜리 모텔이라고? 싫다, 못 간다.


불행히도 이종민은 김나나의 생각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이십만원짜리 호텔 아니면 안 가겠다는 김나나의 생각을 제대로 읽었다면 뭔가 다른 대책을 내놨을 것이다. 하다못해, 귀족다운 우리는 품위있게 오늘 이 자리에서 헤어집시다, 그리고 다음번에 한 번 더 정중하게 모시겠습니다, 이따위 소리라도 하고서 얼른 내뺐을텐데.


이종민은 마지막에 데킬라를 네 잔이나 연달아 마셨기 때문에, 술에 많이 취했다. 게다가 목덜미까지 핥던 끝이라서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여태껏 김나나의 얼굴을 보면서 아슬아슬하게 컨설턴트라며 뻥을 쳐왔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것이 불가능했다. 나사가 제대로 풀린 상태였던 것이다.


“아 시발, 술 너무 많이 마셨는데, 잠깐 씻고 쉬다가 가자구요.”


“아우 싫어요. 호텔 가요.”


“호텔? ”


“지저분해서 이런 곳에 어떻게 들어가요.”


“걀걀걀걀걀. 우리 호텔 하룻밤으로 말하자면, 딸꾹, 한뎃잠을 자고 있는 독거노인의 한달 가스비라니까요. 우리는 복지 현장에 있는 사람들로서 적극적인 노블레스 오블...”


“아우-! 그만하고...”


김나나가 짜증을 냈다. 감언이설에 속아서 참을 수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는데, 무슨 말을 하든간에 저 모텔에는 안 들어갈 생각이었다. 다만 짜증을 큰 소리로 낸 것은 그녀 또한 취했기 때문이었다.


취한 두 남녀의 실갱이는 목소리가 차츰 높아졌다.


“아 대체 왜 이래. 갑시다-! 빨리 가서 시원하게 한 판... ”


“저 더러운 곳은 안 간다니까요.”


“뭐가 더러워, 하나도 안 더럽구만.”


그들의 바로 앞에 있는 쓰러져가는 여인숙 비슷한 건물에서 다리를 저는 중년 여자 하나가 고개를 쑥 내밀더니 말했다.


“그럼 우리 집으로 오실라우? 우리 집 깨끗하고 좋아요. 내가 방삯도 깎아드릴께. 뜨건 물도 잘 나와.”


“아이구, 고맙습니다. 그럼 우리 거기로 갈까? ”


“싫어, 싫다니까 자꾸 왜 이래. 심지어 저 병신같은 아줌마는 방값도 아니고 방삯이래. 무슨 주막집이야? 내가 주막집 갈 여자야? ”


“아니 값도 깎아주신다는데...”


“나 소리 지를 거야.”


“소리-? 아니 대체 소리를 왜 질러, 좋으면서.”


이종민은 짜증이 났다. 그냥 짜증이 난 것이고 아니고, 점점 불같이 화가 치밀었다. 지금껏 마셨던 술에 불덩어리가 하나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야, 이 계집애야, 정말 너 이럴꺼야? ”


“니가 언제부터 나 알았다고 너야? 엉? ”


“이런 망할 뇬이! ”


“뭐, 이 씨팔넘아? ”


사회복지사와 컨설턴트로서 한때 된장남녀스러운 만남을 가지던 이 두 남녀의 싸움은 차츰 걷잡을 수 없이 막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문 안에서 요란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씨 ! 누가 우리 엄마보고 병신이랬어-! ”



- 다음회는 마지막회 -

by 찬별 | 2009/03/16 16:12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2)

본격 칙릿소설 - 사회복지사 김나나의 하루 #11

 

11. 


예전에 노르웨이의 오뎅바의 현자 프랑코 산딸바는 세상의 여자를 크게 싼 년과 비싼 년의 두 가지로 나누었던 바 있다. 그의 제자인 쿄르메스는 이러한 이론을 더욱 계승 발전하여, 예쁘고 잘 주는 년, 예쁜데 안 주는 년, 못 생기고 잘 주는 년, 못 생기고 안 주는 년의 네 가지로 구분하였다. 그리고 이상적인 인간형은 예쁘고 잘 주는 년으로서, 여성 공교육의 현장마다 급훈으로서 ‘예쁘고 잘 주는 년이 되자’를 걸어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바 있다. 진짜로 그랬던 일 있다;;; 암튼 뭐;;;;


여하튼, 이러한 분류 하에서 김나나는 어디에 속할까? 김나나가 먼저 이종민에게 칵테일을 사달라고 했대서, 혹시라도 김나나를 싼 년으로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물론 김나나가 정숙하고 다소곳한 이조시대 처녀스럽지는 않다. 클럽에서 춤을 추다가 우연히 엮인 남자와 원나잇 스탠드를 해본 적도 있고, 소개팅한 뒤 세 번 만난 남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도 있다. 평균적인 여자들보다 조금 더 성관념이 관대한 편이다. 그렇다고해서 직장에서 처음 만난 남자에게 서툰 유혹의 추파를 던질 만큼은 아니다.


김나나가 말한 칵테일 한 잔 사주세요는, 오늘밤 저를 가져도 좋아요, 라는 뜻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저를 그 강 건너 귀족의 세계에 초대해주세요, 정도의 뜻이 되겠다.


하지만 남자는 그렇게까지 복잡한 동물이 아니다. 김나나가 무슨 뜻으로 말을 했든간에, 이종민의 귀에는 ‘2차는 칵테일 바에서 하고, 3차는 그 아랫층에 있는 모텔에서 좀 쉬었다 가요’ 정도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


삼겹살집을 먼저 빠져나간 것은 이종민이었다. 그는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며 자리를 떴다.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누구도 이종민이 나가는 것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바깥으로 나가자, 식당 문 앞에 앉아서 찬바람을 쐬고 있던 박진희가 살짝 나사풀린 눈으로 이종민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디 가세요? "

"아 네, 저 일이 좀 있어서 먼저 들어가보겠습니다."

"네- 네- 안녕히 가세요, 잘생긴 컨설턴트 총각."


이종민은 등 뒤에 꽂히는 여자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바쁘게 걸음을 재촉했다.


김나나는 이종민이 완전히 빠져나간 뒤, 슬쩍 자리에서 일어섰다. 옆 테이블의 재수없는 아저씨 공무원 하나가 옮겨앉으려던 찰나였다. 그 사람을 피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는데, 피하게 된 것은 다행이었다. 술을 따라달라는 둥, 미녀 아가씨와 술잔을 맞대니 행복하다는 둥, 술만 마시면 딱 기분 나쁠 소리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용케 성추행 관련 법에 해당되지 않을 수준으로만 말한다.)


김나나는 신발을 신고 슬그머니 문 바깥으로 나갔다. 어찌된 영문인지 좌석에 앉은 사람들의 눈이 모두 김나나에게 몰렸다. 김나나는 얼굴에 피가 몰리는 것을 느꼈지만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며 당당하게 걸었다. 그녀는 신발을 신고, 마치 화장실이라도 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바깥으로 나왔다. 사람들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뒤를 따라왔다.


급히 바깥을 걸어가는데, 문 앞에 낯익은 사람이 앉아있다. 술에 취해서인지 순간적으로 그 사람이 누군지도 못 알아봤다. 다름아닌 박진희인데 말이다.


"나나 넌 어디가? 컨설턴트 총각 따라가? "


김나나는 가슴이 철렁했다.


"에이 언니, 컨설턴트는 무슨. 나 갑자기 배가 아파서..."


김나나는 얼렁뚱땅 박진희를 따돌리고서 이종민이 기다리는 곳을 향했다. 박진희는 잽싸게 꼬리를 감추는 김나나의 뒷꼭지를 바라보며 말했다.


“쯧쯧쯧, 이 년아, 똥꼬가 치마 먹었어.”


김나나는 황급히 뒤를 만졌다. 하늘하늘한 레이스 치마의 끄트머리가 정확히 똥꼬에 박혀 있고, 덕택에 치마 뒷끝이 말려올라가서 거의 엉덩이가 보일 지경이었다.


이랬으니 사람들이 다 쳐다봤구나. 아이 스타일구겨. 김나나는 얼른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이 엉망이다. 김나나는 얼른 화장을 정돈하고 밖으로 걸어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오늘 하이힐 신고 올 걸.


*


이종민과 김나나는 삼겹살집 바깥 약 삼백미터 지점에서 성공적으로 조우했다. 그런 뒤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약 삼십 미터를 걷고, 이어서 김나나가 이종민에게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었다.


그들은 느린 걸음으로 삼사분 정도를 걸었다. 곧 유흥가가 나왔다. 술집과 보쌈집, 닭갈비, 호프, 이런 것들이 죽 늘어선 골목이다. 여기에는 프렌치 레스토랑이나 호텔 칵테일 라운지 같은 것은 없었다. 기껏해야 넥타이 맨 직장인들이 들어갈법한 좀 깨끗해보이는 바가 몇 개 있을 뿐이었다.


이종민은 잠시 망설였다. 사실 이 상황에서 가장 좋은 선택이 뭔지는 알고 있다. 일단 모범택시를 타고, 근처의 적절한 삼성이나 사성급 호텔로 간다. 그래서 스카이라운지로 올라가서, 한 잔에 만오천원 정도 하는 칵테일을 두 잔 정도씩 마시고, 술을 마셔서 피곤하니 아랫층의 방으로 체크인해서 함께 쉬었다 간다-


이종민은 머릿속에서 바쁘게 계산기를 돌렸다. 모범택시 이만원, 칵테일 팔구만원, 호텔 숙박 십삼만원, 도합 이십여만원이 든다. 여기에다 칵테일 대신에 와인에 치즈라도 시키게 되면 삼십만원을 넘길 수도 있다.


김나나가 대충 일억으로 알고 있는 이종민의 실제 월급은 세후 이백이십만원. 여기서 교통비, 점심값, 통신비 등 기본 생활비 월 오십만원. 부모님 용돈 삼십만원. 적금 칠십만원. 지난번 펀드 건드렸다가 깨진 돈. 이종민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 여자 빤쓰 한 번 벗겨보는 것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오늘 하룻밤에 삼십만원을 쓸 수는 없다.


이종민은 김나나를 이끌고 수입 맥주를 파는 까페로 들어섰다. 김나나의 얼굴이 살짝 굳었으나, 이종민은 그 표정을 무시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맥주 한 병에 오륙천원, 칵테일은 한 잔에 육칠천원. 김나나의 허영을 충족시키기에는 어림도 없다.


이종민은 수입맥주 한 병을 들이키면서, 바에 들어오면서 머릿속으로 대충 정리한 핑계거리를 김나나에게 말했다.


“사실 나나씨 같은 분이 오시기 적절하지 않은 장소인 것은 저도 압니다. 하지만 제가 복지 현장을 찾아다니면서 일한지가 반년 째. 솔직히 저도 조금씩 느끼게 되는 바가 있더군요.”


김나나는 이 인간이 무슨 소리를 하나 하는 생각에, 더 떠들어보라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저는 다행히도 디슨트한 환경에서 태어났고, 경쟁력 있는 교육을 받아서, 지금 이렇게 컨설팅이라는 리스펙테이션이 있는 인더스트리에 성공적으로 안착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 필요가 전혀 없는 대사였지만, 이종민은 최대한 된장냄새를 푹푹 풍기면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오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저는 이곳 등촌18동 말고도 전국의 예닐곱 곳의 복지 사무소를 다녀봤습니다. 그리고서 늦게 깨달았어요. 세상에는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고, 저는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사실을요. 내가 먹는 한 끼의 프렌치 풀코스면 저 한부모 가구의 한달 식비도 되겠구나 하구요. 내가 입은 이 휴고 보스 정장 한벌이면 독거노인 열 명이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겠구나 하구요. 그때 이후로는 먹는 것, 입는 것에 조심하기 시작했습니다. 똘레랑스라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


김나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노블리스 오블리쥬라고 하죠. 선택받은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똘레랑스를 발휘해야 합니다. 자신의 즐거움을 조금 희생한다면 다른 사람은 생존할 수 있게 된다면, 약간의 즐거움은 기꺼이 희생해야죠.”


김나나의 얼굴에 살짝 불만이 서렸다. 저런 이야기를 들을려고 칵테일을 사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종민도 그런 사실을 알기에, 둘러댈 말을 조금 더 준비해뒀다.


“물론 소주를 마셔야 할 때가 있고, 품격을 지켜야 할 때도 있습니다. 이런 장소를 온 것을 죄송하게 생각해요. 이 자리가 솔직히 나나씨처럼 아름다운 분께 어울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솔직히 오늘 나나씨의 가슴에 좀 더 가까이 가고 싶고, 그래서 결례인 줄 알면서도 이런 장소로 왔습니다.”


이종민은 기나긴 이야기를 마쳤다. 그러면서 솔직히 자신도 놀랬다. 헌팅은 대학시절 이후 처음인데, 낯짝이 두꺼운 편이 아니라서 헌팅이 뛰어나지는 못했다. 그런데 삼년 정도 컨설팅이라는 업계에서 뻥을 치고 다니다보니까, 이렇게까지 말빨이 늘어난 것이다. 싸구려 술집으로 끌고 온 이유를 이렇게 실감나게 말하다니, 이만하면 난 천재야.


김나나는 감동의 쓰나미에 휩쓸린 것 같지는 않지만, 굳었던 얼굴은 어느 사이에 얼추 풀어져 있었다. 아무튼 말은 먹힌 것 같다. 아싸 성공이다.


*


by 찬별 | 2009/03/13 16:43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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