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그 : 오서투랄리아
2009/04/25 본격 대체역사소설 - 오서투랄리아 (1부 끝) [7]
2009/04/24 본격 가상역사소설 오서투랄리아 #13 - #14
아보리지니와의 혈투
#1. 정주영의 계획
부리주번 총관의 방은 신선놀음에 아주 그만이다. 넓게 쳐놓은 유리창 덕택에 햇볕이 따뜻하게 (사실은 눈이 부실 정도로 강하니 따뜻하다는 표현으로는 조금 부족하지만) 들어오고,, 창문을 조금 열면 바람이 시원하게 통한다.
오서투랄리아의 사람들은 심심파적으로 차를 마신다. 이 곳의 차는 제국에서 마시는 차와 조금 다르다. 정약용이 귀양오던 시절에 배에다 차를 몇 줌 넣어왔는데, 이곳까지 차를 나르는 동안 차가 시커멓게 썩어버렸다고 한다. 그 차가 오히려 풍미가 더 그윽하기에, 이후에 연구를 거듭하여 만들어낸 것이 바로 이 흑차(黑茶)라고 한다. 흑차 한 잔에 혓바닥이 아릴 정도로 단 맛의 과자를 먹으면 오후가 어떻게 가는지 모르겠다.
지난 번 금광을 빼앗기고 난 뒤 응유엔까이는 금광 탈환을 위해 몇 차례 병력을 보내는 듯 했다. 하지만 그들의 정찰병이 번번히 생포되거나 사살되었고, 또 본격적으로 대부대가 쳐들어온 적도 있지만 그때에는 오철환의 기관포가 그들의 접근 자체를 막아버린 덕택에, 한 번도 그들의 뜻을 이룬 적이 없었다.
이후 시두니에서 증원병력까지 오게 되자, 응유엔까이는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종적이 없다. 척후병을 보내본 결과, 그들은 북부 지방에 위치한 다른 금광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고 있다고 했다. 그럴만도 하다. 부리주번의 병력이 최근 두어 달 사이에 갑자기 두 배가 넘게 늘었으니 말이다.
그 때 바깥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고 미선민이 들어왔다. 정필재 선생의 집에서 일하는 재주 많고 아름다운 여자인 미선민이었다. 남녀간의 내외가 별로 없기 때문에, 미선민은 스스럼없이 내 사무실을 드나들었다. 내게 제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즐겨 듣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나도 그녀에게서 오서투랄리아의 풍토, 초목의 생장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에 배우는 것이 많다.
“미선민 왔나? ”
“나가 누굴 델꼬 왔능가 맞춰보시랑? ”
“누굴 데려왔기에 부산을 떨어? ”
“자, 보씨오용.”
미선민의 뒤로 청년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순간적으로 그 청년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다. 검게 그을린 얼굴, 훌쩍한 키, 건장한 팔다리. 나는 그의 검게 탄 얼굴 안에서 빛나는 두 눈을 보고서야 그가 정주영임을 깨달았다.
“주영이구나, 선비는 삼일에 괄목상대라 하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다. 불과 서너 달 만에 아주 어른이 되었구나.”
정주영은 고개를 꾸뻑 숙이며 인사를 했다. 다산 정약용의 후손으로 부리주번 일대의 호족인 정필재의 큰 아들. 내가 응유엔까이의 광산을 빼앗으면서, 그 곳의 아보리지니들을 관리하고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자리를 잡은지 불과 백일 정도이다. 떠나기 전까지 그는 키는 자랐지만 애티가 물씬 풍기는 소년이었는데, 지금 그는 어깨가 떡 벌어지고 얼굴이 구릿빛으로 그을린 거한이 되어 있었다.
“고생을 조금 했더니 어른이 된 것 같습니다, 형님.”
“수고 많았다. 너를 보니 아주 믿음이 가는구나. 그래, 그 곳의 일들은 모두 잘 돌아가고 있나? 안남인들의 도발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만.”
“예, 형님이 잘 지켜주시고, 오철환 중사가 잘 지켜주는 덕택에, 이제 안남인들은 아무도 도발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몇 번 출하를 했지? ”
“예. 아직은 원석만이지만, 원석은 몇 번 출하를 했지요. 광산이 생각보다 훨씬 큽니다. 지금까지 개발된 것은 새발에 피에 불과합니다. 갱도를 사방으로 넓히고 있는데, 심지어는 갱도에도 금이 들어있습니다.”
“그것 참 어마어마한 매장량이구나.”
“네, 형님. 그래서 이번에 광산을 대대적으로 확장을 해볼까 합니다.”
사실 지금의 광산은 안남인들과 아보리지니들이 땅을 파헤쳐놓은 것에 불과했다. 갱도라고 해봐야 깊지 않고, 채굴되는 양 또한 미미했다. 아주 바보 같지만 나는 안남인들의 광산을 쳐서 빼앗을 생각은 몇 번 했지만, 지금 있는 광산을 확장할 생각은 못 해봤다. 사람들은 모두 자기 관심대로만 생각하는 것으로, 군인은 개척할 생각 대신 빼앗고 죽일 생각을 먼저 하는 것이다.
나는 그의 눈을 쳐다보았다. 정주영의 눈에는 용기와 확신, 빠른 계산, 그리고 배짱이 들어있었다.
“어떻게 할 생각이냐? ”
“지금 광산 이외에 몇 군데에 더 갱도를 만들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러 갱도에서 채굴하는 금을 이곳에서 직접 제련할 수 있도록 제련소도 만들 생각입니다.”
“제련소라...”
“그러려면 물론 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일단은 사람이 많이 더 필요하고, 그 일을 하기 위한 돈도 필요합니다. 광산에서 제련소까지 물건을 옮길 인력도 필요합니다.”
“그래, 아주 좋은 생각이다. 나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주마.”
#2. 제련소 공사
첫 번째 공사는 현재의 광산을 확장하는 것이었다. 오륙미터를 간신히 파들어갔던 광산에서는 몇일 동안 채굴이 중단되는 대신에 확장 공사가 진행됐다. 깊이로 이삼십 미터를 파고 내려가고, 거기서부터 조심조심 사방으로 확장해나가는 것이었다.
정주영도 땅을 파는 일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었다. 얼마나 깊이 파야 할지, 그렇게 파면서도 안전을 확보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목축과 또 다른 문제였다. 시두니에서 기술자를 불러야 하지 않느냐는 말에, 정주영은 일단 한 번 해보자고 대답했다.
그는 땅속을 파고 드는 일을 아보리지니들에게 맡겼다. 위험한 일이었지만, 아보리지니들은 술에 만취한 상태로 아무런 거리낌없이 공사를 맡았다. 그들은 한 달 만에 지하 갱도를 육십 미터까지 파고 들어갔다. 갱도는 나무와 철근을 박아 지지했다.
땅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자 채굴량이 당장 달라졌다. 지금껏 열 번 삽질에 한 덩어리의 원석을 캐었다면, 지금은 두 번만 삽질해도 한 덩어리의 원석이 나왔다.
그러자 정주영은 두 번째 공사로 제련소를 짓도록 했다. 원래는 두세 개의 광산을 더 개발한 뒤에 자체적 제련소를 가지려고 했다. 채산성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첫 번째 광산에서 채굴되는 양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았다. 광산을 세 개쯤 개발해야 나올 것으로 짐작했던 양이었다. 그러니 즉시 제련소를 만드는 것이 숙제가 되었다.
미선민은 이 공사를 천천히 할 것을 권했다. 미선민은 고대에 가장 존경받던 기술이 대장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기 때문이었다. 막무가내로 밀어붙혀서 될 일이 있고 안될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주영은 해보면 된다는 신조로 일단 밀어붙이자고 했다.
수백 도의 고열을 내기 위한 용광로, 금과 불순물을 걸러내는 시설, 정제된 금을 굳히는 시설 등을 처음 만드는 데에는 대략 일주일이 걸렸다. 낙천적이고 느릿느릿한 부리주번 사람 기준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빠른 행보였다. 부리주번에 있는 대장장이와 옹기장이가 힘을 합쳐서 용광로를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설은 불과 사흘 만에 망가지고 말았다. 흙으로 빚은 가마가 고열을 견디지 못하고 깨진 것이다. 불 붙은 땔감이 좌르르 쏟아지는 바람에, 하마터면 사람이 크게 다칠 뻔 했다. 결국 정주영은 시두니에서 기술자를 불러올 수 밖에 없었다.
기술자는 부숴진 용광로의 잔해를 보고는 말했다.
“흙이 문제였습니다.”
“흙이? ”
“오서투랄리아의 흙은 열기가 너무 높아지면 갈라집니다.”
“그렇고마니롱.”
“적당한 흙을 구하는 것이 첫 번째 과제입니다. 가루가 곱고 점성이 강한 흙은 보통 지하수가 있는 지역 주변에 많습니다.”
정주영이 기술자를 데리고 부리주번 근처의 이런 저런 곳을 구경시켰다. 하지만 기술자는 매번 흙을 만져보고는 고개를 저었다. 점성이 부족해서 굳지 않는다, 습기가 과해서 향후 갈라진다, 여러 가지 이유를 댔다.
이번에는 정주영은 기술자를 광산 근처로 데려가서 토질을 검사하도록 했다. 이번에는 쓸만한 흙이 있기는 했지만, 양이 많지 않았다. 마치 금광에서 금을 캐듯이 집을 짓기 위한 흙을 골라야 하는 판이다.
그 때 미선민이 말했다.
“붕가라탑은 어떠니양?”
정주영이 눈을 반짝 떴다.
나는 붕가라탑을 지도에서만 본 적이 있을 뿐, 실물을 본 적은 없다. 그곳은 부리주번에서 이백 리 가까이 강을 타고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서, 내륙으로 십 리쯤 들어간 곳에 있다.
정주영이 말했다.
“형님, 군사들이 일을 좀 도와줄 수 있갔시욘? ”
#3. 붕가라탑, 아보리지니의 첫 번째 공격
“나는 이런 일에 무지한 무부라서 잘 모르겠네만, 흙이 그렇게 중요한거요? ”
미선민이 먼저 웃으며 말했다.
“동길 오라비넌 잘 암시롱 그라요롱. 글코롬 쉬운 일이 아니랑게롱. 흙이라고 다 같은 흑이 아닝께, 불에 굽는다고 전부 단단해징것도 아니고롱 말이요. 생각해보쎠로잉. 모래로꾸 집을 짓을 수 있겄냥가롱? ”
그러자 시두니에서 왔다는 기술자가 말했다.
“제국에서는 집을 흙으로 짓잖습니까. 하지만 오서투랄리아에서 흙으로 지은 집을 본 적이 있습니까? ”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렇다. 대부분의 민가는 널판지로 짓고, 시두니 본부 같은 큰 건물은 아예 화강암으로 지었다. 제국에서는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흙을 바르는 것과 다르게 말이다.
“하지만 이 흙은 쓸만하겠습니다.”
기술자는 손끝으로 돌탑 조각을 떼어내 부스러뜨리며 말했다. 기술자가 고개를 끄떡이자, 마침내 정주영과 미선민이 눈을 마주하며 활짝 웃었다.
“그래, 이 흙이 쓸만하다니 써야겠지만, 그래도 이 경관을 해치는 것은 좀 아깝군.”
나는 짐짓 주변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말에는 미선민과 기술자, 정주영, 모두가 잠시 말을 멈추고 주변을 보았다.
누구든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벌판은 장관이다. 세상 어디에 돌기둥이 숲을 이룬 곳이 있을까. 어림잡아도 이삼백 개는 될만큼 많은 돌기둥이 벌판 가득하게 늘어서있다.
하나하나의 돌기둥도 아름답다. 가는 것은 어린아이 몸통만하고, 굵은 것은 어른 세 명이 껴안아야 할만큼 굵다. 높은 것은 삼사십척은 되고, 낮은 것도 십척은 된다. 돌기둥은 두 가지 색으로 되었는데, 흰 색의 아랫단과 푸른 색의 윗단이 일부러 쌓아놓은 듯 색이 다르다.
수백 개의 돌기둥은 단순히 아름다운 정도를 넘어서, 비장미 또는 신성함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참말로 이뿐 곳이기는 하지요롱.”
미선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깡- 하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돌탑 사이에 있던 오철환이 나무 베는 도끼로 돌탑을 때린 것이다. 도끼로 돌을 찧으면, 날이 빠지고 도끼질한 이는 손이 저려야 정상이다. 하지만 돌이 연해서 도끼질한 만큼 움푹 들어가있었다.
“그냥 나무하듯이 썰면 되겠는데요.”
오철환이 아래에서 고함을 질렀다. 나는 그대로 한 번 해보라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기술자가 말했다.
“흰 돌과 푸른 돌을 빻아서 섞으면, 쇠를 녹일만큼 고온이라도 튼튼히 견딜 수 있는 용광로가 될 겁니다.”
나는 기술자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사람이 돌탑에 기어올라가 꼭대기에 밧줄을 묶었다. 세 방향에서 밧줄을 잡아당겨 돌탑을 지탱하는 가운데 오철환이 신나게 도끼질을 했다. 쩌렁쩌렁하게 돌 깨지는 소리가 나고, 돌가루가 사방으로 휘날렸다. 마침내 오철환이 큰 소리로 외쳤다.
“넘겨라-! ”
길이 삼십 척의 거대한 돌기둥을 다른 돌기둥이 없는 쪽으로 조심조심 기울였다. 돌이 마침내 쿵 넘어지자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철환이 첫 번째 돌기둥을 넘어뜨린 것이 시범이 되었다. 다른 사람들이 제각기 돌탑을 하나씩 끼고, 가지고 온 연장대로 도끼질과 톱질을 시작했다. 돌탑이 썩썩 썰려나갔다. 군사들도 지루한 경계근무 대신 몸을 쓰는 것이 신나서 흥을 냈다.
가만히 채굴 현장을 보고 있는데, 계곡 너머의 수풀에서 까만 얼굴 하나가 쏙 솟아나왔다. 아마도 아보리지니일 것이다. 돌을 깨고 부수는 소리가 온 숲을 쩌렁쩌렁 울리니까 구경이라도 나온 것이리라.
그러나 이들이 이렇게까지 접근하도록 보초 녀석들은 무슨 딴 짓을 했던 거지? 낮잠이라도 자고 있나?실전을 치룬 지 너무 오래라서 군기가 빠진 모양이다. 단단히 군기를 채워줘야겠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잠시였다. 아보리지니의 머리가 연달아 쏙쏙 숲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구경하려는 사람들의 표정이 아니었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모두 조심햇! ”
나는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에 숲속에서 수십 명의 아보리지니가 한꺼번에 머리를 번쩍 치켜들고, 이어서 창을 던졌다.
# by | 2009/05/10 00:20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0)
#15. 역습 작전
- 정.필.재.는.죽.었.음.끝.
스티붕은 평소 그가 전신을 보내는 시간과 같은 시간에, 전신기에 앉아서 한 손으로는 발전기를 돌리고 다른 손으로는 부호를 타전했다. 뚜-뚜뚜뚜-뚜뚜뚜뚜-
평소에는 그 혼자, 그리고 기계음을 최대한 낮추어서 작업했겠지만, 지금은 주변에 사람이 많다. 스티붕에게 보낼 내용을 지시하는 것은 나였고, 안중근과 정주영은 그가 보내는 내용과 부호표를 대조하며 감시했다.
그리고 중독 이후 사흘간 미선민의 정성스러운 간호를 받은 덕택에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나기는 했지만 이틀간의 중병으로부터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난 정필재는, 반쪽이 된 얼굴로 한숨을 내쉬며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 확.실.히.죽.었.나.끝.
- 확.실.하.다.끝
- 장.례.는.언.젠.가.끝.
- 열.흘.간.끝.
전신 대화는 짧게 끝냈다. 안남 측에서는 이런저런 대화를 조금 더 시도했지만, 내가 일방적으로 끊어버렸다.
짧게 경험해본 바로, 응유엔까이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자다. 그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초급 군관이라는 거짓말도 아끼지 않았고, 백인 노예를 이용해 마을의 존장 암살을 노리기도 했다. 이제 장례 기간의 혼란을 이용해서 마을을 공격할 것이 틀림없다.
그는 아마도 내일부터 전투를 준비할 것이다. 빠르면 내일, 늦으면 모래 출군할 것이고, 백리길을 행군 후에 그 다음날 쯤 이곳을 기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내가 노리는 것이다. 최소한 응유엔까이는 오늘 내일 중에 공격을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군 준비 됐나? ”
내가 말하자, 앞장선 두 명의 중대장이 소리를 질렀다. 내가 지휘하는 다섯 분대장 중 선임 분대장인 오철환. 그리고 안중근의 선임 분대장이자 오철환과 술싸움을 벌였던 돌격대장 홍총각. 둘 다 무식하고 힘 세게 생겼다. 그들 두 사람이 자신 만만하게 준비 완료를 외쳤다. 이미 적진 가까이까지 접근해서 공격 준비가 끝난 길상까지 포함하면, 공격 준비는 완벽하다.
“준비 됐습니다! ”
“좋다! 지금부터 전군 일제 진격한다. 목표는 남쪽 팔십리. 황금 해변의 입구다. 목적지의 오 리 바깥에 길상이 전진 기지를 세워뒀다. 목적지는 그곳이다. 전군 진군! ”
나의 명령과 동시에 백오십 명에 달하는 병력이 채찍으로 말을 후려쳤다. 말들이 일제히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총, 칼, 기관포, 폭탄 등 각자의 장비로 무장한 백오십 명의 병력이 말을 타고 사막을 달리자 거대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안남인들에 대한 선제공격. 최근 들어 부쩍 잦아진 안남인의 침입을 막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했던 일이다. 안중근의 병력 만으로는 부족했기에 생각만 했을 뿐 시작하지 못했는데, 나의 병력이 합쳐짐으로써 가능하게 된 것이다.
작전대로라면, 길상이 몸이 빠른 부하를 데리고 적진에 먼저 침투한다. 그래서 은밀하게 적의 보초들을 쓰러뜨리고, 간부들을 암살하거나 무력상태에 빠뜨린다. 여의치 않다면, 막사에 불을 지르는 등 혼란을 야기시킨 뒤 달아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이번에는 오철환과 홍총각의 본진이 공격할 차례다. 오철환이 기관포를 앞세워 적진을 초토화시키고, 홍총각이 삼십 근 짜리 망나니칼을 들고 적진을 휘젓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안남의 민간인은 최대한 다치지 않게 하며, 또한 적병도 가급적 살상을 최소화한다. 응유엔까이를 비롯한 지휘관들을 생포하거나 부득이하면 사살한다.
대략 이것이 오늘의 작전이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 작전은 작전을 세운 사람의 마음대로 진행되는 법이 드물다.
#16. 의문의 불꽃
우리는 안남인들이 모여사는 황금의 해변에서 불과 이삼 리 바깥에 모였다. 사전에 계획된 이동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무런 어려움없이 목적지에 모였다. 이삼 리 바깥의 안남인의 마을은 잠에 빠져 조용했다. 가끔 개 짖는 소리, 그리고 멀리서도 눈에 띄는 그들의 횃불 정도가 그곳에 마을이 있음을 알려줄 뿐이었다.
우리는 세 시간의 휴식을 가졌다. 이어서 선봉대가 먼저 출동했다.
“잊지마라, 길상. 푸른 신호탄은 정상적인 출동, 노란 신호탄은 위기 상황, 붉은 신호탄은 후퇴를 의미한다.”
길상은 고개를 끄떡이고 부하 이십 명을 이끌고 달려갔다. 마치 사막의 여우나 뱀이 움직이듯 먼지 하나 일으키지 않고 빠르게 달리더니 잠시 후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나는 초조하게 전방을 주시하면서 그들의 신호를 살폈다. 한참이 지나도 신호가 오지 않았다. 혹시 그들이 발각되어 위기를 알릴 틈도 없는 것이 아닐까? 나는 초조하게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마을에서 긴 꼬리를 올리는 신호탄이 쏘아올려졌다. 푸른 색이다!
“전체-! 진격-! ”
나는 군사 전원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말을 탄 병력 전원이 요란한 발굽 소리를 내면서 진군했다. 천지가 진동할 듯 북을 울리면서 말이다. 마을에서도 곳곳에 횃불이 밝혀졌다. 아마 길상이 밝히는 횃불일 것이다.
집안에 들어있던 사람들이 후닥닥 튀어나오면서 마을이 아수라장이 되었다. 마을에서 몇몇 사람들이 창이나 장총을 들고 튀어나왔다. 하지만 오창환이 허공에 기관포를 연달아 발사하자,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다.
그런데... 그들은 안남인이 아니었다!
안남식 집, 안남식 거리. 그러나 안남인이 아니라, 검은 피부의 아보리지니들이었다. 안남식 옷을 입거나, 심지어는 장총을 들기도 했지만 그들은 모두 아보리지니들이었다.
왜 안남인이 아니고 아보리지니들이지? 설마 응유엔까이가 내 역공작을 알고 역습을 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 그는 우리와 다른 길을 통해서 부리주번을 공격했단 말인가?
순간적으로 정신이 아찔하기는 했지만 나는 좀 더 침착하게 생각해봤다. 부리주번의 가장 높은 언덕에서 정찰하면 주변의 삼십 리 정도는 충분히 볼 수 있다. 출동 전의 정찰 결과로 보건데, 안남인이 역습을 펼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리고 부리주번은 안중근의 철통같은 방어태세 하에 있다. 백오십 명이 이곳에 출동했지만 오십 명 이상의 병력이 부리주번을 지키고 있다. 병력은 적지만, 사전에 적재적소에 중화기를 배치했기 때문에 그 병력으로도 방어는 충분하다. 내가 할 일은 이번 공격을 완벽하게 성공하는 일이다.
부대원들은 사방을 대낮같이 밝히고 근방을 샅샅히 뒤졌다.
“대장님, 여기에 안남인이 하나 있습니다.”
나는 그 자를 잡아둔 곳으로 갔다. 마르고 조그만 안남인 하나가 겁에 잔뜩 질려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그 자는 군인이 아니라 민간인이었다.
“응유엔까이는 어디있나? 너는 뭐하는 놈이냐? ”
“살려만 주십시오. 저는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 자는 꽤 유창한 제국어로(오서투랄리아 사투리가 아닌 대륙의 제국어로) 대꾸했다.
“응유엔까이는 어디있냐고 물었다.”
“군인들은 원래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안남인 가족들과 함께 두 달 전부터 남쪽 지역으로 옮겨갔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홍총각을 쳐다보았다. 안남인들이 황금의 해변에 모여산다는 것은 안중근이 알려준 정보였기 때문이었다. 홍총각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친구는 기운 세고 용기는 뛰어나지만, 아무래도 머리는 조금 모자란 것 같다. 나중에 안중근에게 자세한 사정을 물어봐야겠지만, 아마도 첩보가 오래되었기 때문에 생긴 일일 것이다. 그들이 오륙개월 전에 황금의 해변에 있었기 때문에 지금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던 것이다.
나는 쓴 입맛을 다셨다. 황금의 해변을 덮쳐서 안남인들의 뿌리를 뽑아내려던 계획이 이렇게 쉽게 실패로 돌아갔다. 아쉽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안남인들의 거주지가 어디일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그 곳을 덮칠 때 쯤이면 안남인들은 이미 우리의 거짓 정보를 모두 알아냈을 후가 아닌가.
“그렇다면 너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 ”
“저는...”
그 자는 대답을 망설였다. 그 때 마을을 헤집고 달리던 오철환이, 산이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장님! 여기에 광산이 있습니다! ”
“뭐라고? ”
“금광입니다. 창고에도 온통 원석입니다! ”
#17. 금광의 개발
소기 1600년 이순신 장군이 오서투랄리아를 발견한 이래, 이곳은 예로부터 유배지에 불과했다. 조카를 폐하고 충신을 죽이는 등 유난히 업보가 많았던 세조 임금은 속죄의 차원으로 죄인의 사형(死刑)을 금지시켰고, 그 이후로 죽을 죄를 지었으나 차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 오서투랄리아로 보내졌다. 왜냐하면 이곳은 한 번 가면 돌아올 수 없는 땅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삼백년이 지난 현재, 소기 1900년까지도 마찬가지다. 밤에도 대낮같이 불을 켤 수 있는 시대. 전차가 도시를 가로지르고, 천리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도 순식간에 전보를 보낼 수 있는 시대.
그렇지만 여전히 오서투랄리아는 유배지에 불과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저 금광과 함께 말이다. 아니, 금광이 전부가 아닐 것이다.
안남인들은 이미 금광의 존재를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심지어 이 곳에 왕자를 보낸 이유도 다름 아니라 금광 때문이었다. 그 왕자가 성난 호랑이처럼 전장의 선봉에 서는 것은 기질 탓이겠지만.
안남인들이 소유한 금광은 이것 하나가 아니었다. 북쪽의 다원 주변에는 예닐곱개의 금광이 이미 개발중에 있고, 이 곳 부리주번 인근에는 현재 두 개가 개발되었지만 십여 곳에 금이 매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고 했다. 그러니 그들이 부리주번의 안중근을 그토록 괴롭힌 이유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만 하다.
그리고 안남인들은 현지의 아보리지니들을 적당히 유화시켰다. 이곳도 그런 곳 중의 하나다. 기꺼이 안남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아보리지니들에게는 의복과 주거를 제공하면서, 그리고 그들에게 노동을 시켰다. 이 곳의 아보리지니들도 안남인들이 제공하는 설탕과 술의 맛에 흠뻑 빠져 그것을 얻는 댓가로 땅을 파서 금을 캐는 자들이다. 그들의 수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부리주번의 사람들은 우리가 가져온 소식에 크게 경악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고 하기도 했다. 부리주번 사람들 사이에, 안남인이 이 땅에서 금을 캔다더라는 소문은 이미 있었던 모양이다.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는 그런 소문 말이다.
부리주번에서는 회의가 벌어졌다. 우선은 새롭게 발견한 금광을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지킬 것인지, 그 소유권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큰 의제였다.
오랜 토의 끝에, 결국 현재와 마찬가지로 아보리지니들의 노동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아보리지니들도 별로 반대가 없었다. 안남술보다 우리가 제공하는 보리술이 더 맛이 좋았고, 우리가 안남인들보다 더 많은 설탕을 제공했으며, 덧붙여 우리는 그들에게 돼지고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강가루 고기를 주로 먹던 그들은 고추장과 설탕을 넣어 익힌 돼지고기를 맛보고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광산 소유자를 정하는 것도 꽤 많은 토론이 필요했다. 광산을 소유하고 아보리지니를 관리하며 채굴된 광석을 가공해서 판매할 사람을 정하는 것 말이다. 안중근과 정필재가 물망에 올랐으며, 내 이름도 몇 번 거론되었다. 결과는 정필재가 육할, 안중근이 삼할을 책임지기로 했다. 그리고 정주영이 광산에 거주하면서 주무를 맡기로 했다. 어리지만 용기있고 배짱있으며, 무엇보다도 본인이 이재(理財)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년 후에 그는 대한제국을 대표하는 거상이 되지만, 그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나 또한 중요한 의사결정자였다. 제국 정부와의 관계를 대표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도 삼할의 지분을 제안했다. 그들은 제국 정부를 믿지는 않지만, 내가 쓰는 보고서 한 줄에 의해 그들의 존립 기반 자체가 위태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삼할의 지분 대신 정중히 일할만 받기로 했다. 지분이 커서 나쁠 일은 없었지만, 금광을 찾아 여기까지 온 뜨내기처럼 보이고 싶지가 않았다. 원래 떼돈을 버는 것이 목표도 아니었으니까 크게 아쉬운 것도 없다.
그리고 나는 시두니에 있는 오서투랄리아 총관에게 이렇게 보고서를 썼다.
“부리주번의 광업이 급격히 중흥하고 있음. 본관은 안남과의 영역 전투를 통하여 일개 금광을 탈취하였으며, 향후 광산의 수비 및 지속적인 개발을 위하여 추가 병력이 필요함. 해당 광산의 성과는 향후 오년 이내에 제국의 재정에 공헌할 것이 예상됨. 상기 사유로 인하여 오 개 분대 이상의 병력 증원이 필요함.”
그리고 총관에게는 내가 아버지에게 보내는 서신의 사본이라면서 이렇게 보내주었다.
“동길은 이 곳에서 제국의 무관으로서 성실히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중략)... 시두니의 총관인 백인천 대좌는 대단히 인상적인 지휘관입니다. 그는 초보 무관인 제가 성장하기 위한 많은 자양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시두니의 질서는 그가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듯 합니다 ... (하략) ”
백인천 대좌는 편지를 보고 좋아서 입이 쩍 벌어졌다. 그는 당장 시두니의 병력 오 개 분대를 보내주었다. (안중근의 휘하에 있어서 전혀 통제가 되지 않던 부리주번을 지휘 영역 안에 넣게 된 것도 작지 않은 공헌이었다.) 내 휘하의 병력은 이제 대략 이백 명. 나는 소좌로 임관한지 불과 육개월 (항해 삼개월을 제외하면 실제 근무는 삼개월) 만에 중좌급의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ps. 여지껏 써서 내 블로그에 올렸던 헛소리 소설 중 가장 반응이 썰렁하다..... -_-;;;
무플방지위원회에 중재신청이라도 해야 되는거 아닐까 -_-;
# by | 2009/04/25 07:58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7)
#13. 미선민의 치료
미선민이 날쌔게 달리는데, 제국의 처녀들처럼 엉덩이만 요란하게 흔드는 오두방정이 아니다. 성큼성큼 달리는 모습이 마치 운동선수처럼 거침이 없었다. 나도 힘껏 뛰지 않으면 따라잡지 못할만큼 빠르다.
바둑판 모양의 격자 도로를 몇 차례 좌우로 비집고 들어가자 흰 색으로 칠해진 삼층 집 하나가 나왔다. 오래된 집이지만, 낡았다기보다 유서깊다는 느낌을 주는 그런 곳이었다. 두말할 것 없이 정필재의 집이다.
사람들 몇 명이 나무로 만든 침대 곁에 모여있다가, 미선민이 달려들어오자 사람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술냄새를 풍풍 풍기며 들어온 내게는 아무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침대에는 얼굴이 새까맣게 된 정필재가 누워있는데, 얼핏 보기에도 물풍선처럼 부풀어 있었고 좌우에 토사물을 닦은 자국이 있었다. 정필재의 아들인 듯한 나이에 비해 성숙해보이는 소년이 미선민에게 말했다.
“아칙 기침이 늦으신게롱 들어와봤더니 요로크름 쓰러지싱게랑.”
미선민은 정필재의 눈동자를 까뒤집고, 맥을 짚고, 입을 벌려 혀를 잡아당겨 보았다. 혀가 까무잡잡하다. 독한 냄새가 풍겼다. 이게 무슨 냄새지? 술냄새이긴 한데, 그 속에 뭔가가 섞여 있지 않고는 이런 냄새가 나지 않는다.
미선민은 머리에서 은비녀를 뽑더니 정필재의 입 속에 넣어보았다. 아니나다를까, 은비녀가 까맣게 변했다. 독이 틀림없다. 미선민은 정필재의 아들에게 말했다.
“주영아, 어즈께 밤에 뭐를 드셨드랬냥? ”
“백인 노예덜과 술을 잡수셨는디링...”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백인 노예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들은 모두 몸둘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 중 한 사람은 낯이 익다. 어제 배를 대고 들어올 때 항구에서 봤던 주정뱅이였는데, 아니나다를까 지금 이 이른 아침시간에도 얼굴이 시뻘겋다.
“잡숫고 남은 것이 뭣이 있걸랑 가져오랑.”
“갱거루들 묵으라고 줘버렸는디요롱고롱.”
순간 정필재의 아들인 주영이 멱살을 쥐며 소리를 질렀다.
“가서 찾아와라고롱! 갱거루가 먹었으면 그 먹은 갱거루를 잡아오든지! ”
백인 노예가 얼굴이 허옇게 질려서 허겁지겁 달려나갔다.
미선민은 정필재의 몸 이곳 저곳을 살피더니 그의 한쪽 다리에서 시선이 멎었다. 희미하나마 바늘로 찔린 듯한 흉터가 남아있는 것이었다. 미선민은 그 자리에 침으로 상처를 냈다. 검은 피가 찔끔찔끔 흘러나왔다. 마치 수은처럼 덩어리진 피였다. 미선민은 피가 방울진 모양을 보더니, 내게 말했다.
“음식으로 독을 잡수신게 아니요롱. 전갈 독이용. 선생님을 엎드리게 해주씨용. 그리고 웃옷을 벗겨불고롱.”
나는 얼떨결에 그녀가 시키는대로 했다. 사람도 많은데 하필 왜 나를 시켰을지는 모르겠지만. 미선민은 정필재의 등어리에 십자로 칼집을 네 개 만들고, 그 네 자리에 부황을 붙였다. 부황 자리에서 피가 샘솟듯이 흘러나왔다. 미선민은 고약한 냄새가 나는 독혈을 닦아내고, 열십자로 찢어낸 상처 속으로 뭔가 가루를 털어넣었다.
“인자는 앞으로 지대로 눕혀주씨용. 아랫옷을 벗겨불고롱.”
누운 자세를 바꾸는데 침대 이불보 사이에서 뭔가가 기어 움직였다. 시커멓고 조그만 전갈이었다. 전갈을 보는 순간 미선민은 반색이 되었다.
“네가 슨생님을 해쳤구낭. 이제 네가 슨생님을 낫게 히드려야 쓰겄다랑.”
그녀는 겁도 없이 전갈을 집어들어 독침을 뽑아 바닥에 버리고, 껍질을 쩍쩍 벗겨냈다. 그러더니 그 껍질과 전갈의 피를 정필재의 상처 부위에 척척 이겨 발랐다.
미선민은 퉁퉁 부은 정필재의 상처 부위 주변에 몇 개의 칼집을 냈다. 그곳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부황을 뜨자 피가 아닌 맑은 진액이 흐르다가, 잠시 후에는 고름이 나왔다. 미선민은 그 곳에서 얼추 한 바가지는 될 만큼의 고름을 퍼내고서 마찬가지로 전갈의 껍질과 살을 발랐다. 그러고서 진땀을 닦았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안중근이 굳은 표정으로 있다가 미선민에게 물었다.
“어때? 어르신은 괜찮으시겠나? ”
“괜찮으실거용. 전갈 꼬리 독은 전갈 피로 닦으면 낫으닝게링.”
“그런데 전갈독 때문이라니. 선생님이 전갈에게 쏘이셨나? ”
“선생님이 어즈께 백인 노예들과 술을 잡수셨다고 그랬소로잉.”
안중근의 안색이 싹 변했다.
“백인 노예들 따위와 술이라니. 언젠가 큰 일을 당하실꺼라고 그렇게 말씀을 드렸어도...”
안중근은 씹어 뱉듯이 말을 하고는 돌아섰다. 그의 차분하고 점잖던 얼굴이 순식간에 악귀처럼 무섭게 변했다. 그의 눈이 백인 노예들을 찾고 있었다. 백인 노예 몇 사람이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 바르르 떨었다. 안중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밖으로 나가라. 지금 당장! ”
백인 노예들이 허겁지겁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14. 변절한 백인 노예
마당으로 나갈 때 쯤 안중근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는 짐승을 몰 때 쓰는 채찍 한 자루를 뽑아 바닥을 후려쳤다. 쫙- 하면서 땅이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키가 팔척이나 되는 백인 노예들은 흙바닥에 꿇어앉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안중근은 그들에게 어제 무슨 음식을 먹었냐고 묻지 않았다. 누가 선생님과 함께 술을 먹었는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냥 채찍을 후려쳤다.
- 철썩
“아우치.”
무서운 소리와 함께 노예 두 사람이 한꺼번에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안중근은 채찍을 위아래로 흔들며 춤추듯이 내리쳤다. 백인 노예들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피가 튀고 살이 묻어났다. 노예에게 사형(私刑)을 가하는 것은 제국에서는 거의 사라졌지만, 이 곳 오서투랄리아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인 듯 했다.
나는 백인 노예의 면면을 보았다. 꿇어 엎어져 매를 맞고 있는 이 자들은 하나같이 칠팔척의 거구에 성성이처럼 털이 무성했다. 무지하고 기운 센 백인 노예는 거친 황무지 일에는 제격이다. 늙거나 병들어 죽은 짐승의 고기와 술찌꺼기만 먹여도 황소 같은 힘으로 꾸역꾸역 일을 해내는 자들이다.
그러다가 순간 나는 백인 노예 중 한 사람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까 정주영에게 욕을 먹고 어제의 음식 중 남은 것을 가져오라고 했던 그 주정뱅이였다. 순간 나는 처음 항구에 도착한 날 연기를 피우던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머릿속에 집히는 것이 있었다.
나는 얼른 말 한 마리를 잡아타 밖으로 달렸다. 그리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그 놈, 술주정뱅이 백인 노예 어디갔나? ”
나는 질문을 해놓고도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다. 백인 노예 중에 술주정뱅이가 아닌 자가 있던가?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사람들은 말뜻을 알아들었다.
“스티붕(獸値硼) 말이오? 저 쪽이오.”
나는 사람들이 가리킨 방향으로 말을 달렸다. 불과 몇 초를 달리자 마을을 벗어났고, 다시 얼마를 달리자 황무지가 나왔다. 멀리 앞쪽에서 말에 올라탄 사람이 보였다. 거의 전속력으로 마을에서 벗어나고 있다. 그 자가 틀림없다.
“이럇-! ”
말의 배를 힘껏 걷어찼다.
잠시 후 내 바로 뒤에서 정필재의 아들인 정주영과 그의 부하 두 사람이 뒤를 따랐다. 그들은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려나갔다. 이 말들은 하나같이 빠르다. 오서투랄리아의 공기가 말 다리에 기운을 주었는가?
우리의 추격을 깨달은 도망자도 박차를 가했다. 황무지의 지리한 추격전이 시작되었다. 오전 무렵 시작된 추격전인데, 해가 머리위에 다다르도록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살을 구워버릴 듯한 남반구의 뜨거운 햇살에 대지가 데워지고, 차츰 지열이 솟구쳐 올랐다. 덩치 큰 스티붕을 태운 말이 차츰 지치기 시작했다. 약 삼사십분을 더 달렸을 때, 다리에 힘이 빠진 스티붕의 말이 돌에 걸려 쓰러졌다.
수티붕은 비명을 지르면서 달아나려고 했다. 주영은 올가미를 던졌고, 정확하게 수티붕의 목과 한쪽 어깨를 낚아챘다. 그 순간 주영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말이 달려가고, 버둥거리면서 몇 걸음 따라 달리던 수티붕이 결국 넘어졌다. 그는 오만 비명을 지르면서 흙바닥에 질질 끌려갔다. 삽시간에 수티붕의 옷이 뜯겨지고 살갗이 찢어졌다. 그는 금세 피투성이가 되었다.
나는 실수로라도 수티붕이 죽을까봐 주영을 말렸다. 그리고 수티붕을 꿇어앉힌 뒤 정수리에 칼날을 겨누고 말했다.
“너 응유엔까이와 내통하고 있지? ”
주영의 표정이 삽시간에 싹 변했다. 그럴 가능성 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수티붕은 얼굴이 하얗게 되어서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면 삶이 보장되기라도 하는 듯이.
“거짓말 하지 마. 넌 안중근 시장과 민병들이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응유엔까이에게 알려줬고, 정필재 선생을 독살하려고 그 분의 잠자리에 전갈을 풀었어. 내 말이 틀렸나? ”
“그런 적 웂당께롱고롱. 지넌 그런 적 웂씨요롱고롱. 참말이지랑가랑.”
“네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디 한 번 가서 보자.”
나는 그를 결박해서 마을로 데려왔다. 그냥 말 뒤에 목을 걸어서 끌고 오자는 주영에게, 이 자에게 비밀을 캐내려면 살려둬야 한다고 간신히 설득해서 말이다.
마을로 도착해서 곧 스티붕의 방과 일터를 뒤지기 시작했다. 창고에서 여러 물건이 나왔다. 소형 전신기가 나왔고, 전신 부호 해석표, 안남술 두 병(냄새를 맡아보니 꽤 고급술이었다), 금괴 한 개가 나왔다. 술만 넉넉히 준다면 무슨 짓이든 할 자라는 첫인상을 받았는데, 그것이 증명된 셈이다.
“술 몇 병에 충성심과 영혼을 배신하다니. 썩어빠진 놈.”
스티붕의 방에서 술과 전신기가 나오자, 정주영은 금방이라도 스티붕을 살해할 듯 칼을 꺼내들고 달려들었다. 아무래도 정주영의 백인 노예를 다루는 것에 대한 태도는 부친 정필재보다는 안중근에 더 가까운 것 같았다.
“그만두게.”
“아니, 홍 대장님은 이따우 짐승만 못한 것을 없애덜 못하그름 말리십니게랑가? ”
“목숨 붙은 것을 아껴야 한다. 죄 지은 자도 고칠 기회를 줘야 한다.”
“그런 허무맹랑헌 소릴랑은 허지 마씨오롱. 공자님 절루 가라 허시던 우리 부친이 당한 일을 보씨오롱.”
“이 놈! 꼬박꼬박 대꾸하지 마라! ”
정주영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 그의 눈에는 불만이 가득 들어있었지만, 차마 드러내놓고 반항하지는 못했다. 나는 정주영을 두고 스티붕에게 다가갔다. 스티붕은 겁을 먹었지만, 내게는 안심하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입에 담배를 물렸다.
물론 나도 그가 예뻐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죄 지은 자도 고칠 기회? 그 따위 개소리라니. 백인 노예에게 시킬 일이 있기 때문에 감싸는 척 했을 뿐이다. 정주영에게는 본의아니게 소리를 질러서 조금 미안하게 되었지만.
# by | 2009/04/24 00:50 | 찬별의 소설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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